UPPh 031

1 UPPh_031.jpg[ | ]

GILA

1969년 봄, Stuttgart의 한 정치적 단체의 멤버들이 결성한 그룹 Gila는 독을 가지고 있는 갑각류로서 도마뱀과 닮은 동물의 이름을 그룹명으로 채택했다. 처음에는 Conny Veit, Walderkehr(Bass), Fritz Scheyhing(오르간, 멜로트론), Daniel Alumno(드럼) 등이 속해 있었다. 결성된 후 2년동안 Live그룹으로만 활약해 왔던 Gila는 1971년 데뷔앨범 “Gila"를 BASF레코드사를 통해 발매했다. 이 앨범은 공격적인 사운드로부터, 박력 넘치는 기괴한 사운드를 거쳐 신비한 사운드를 배경으로 하는 대화(Dialogue)로서 끝을 맺는 걸작이었다. Sound誌는 “황홀한 도취감이 그윽하고, 울림과 반향이 풍부한 Elektro-Rock앨범”이라고 해설했다.

1972년 봄, Conny Veit는 결성멤버들과 결별하고, 반년 후 그는 Florian Fricke(Popol Vuh의 리더), Daniel Fichescher(이전에 Amon Duul II의 타악기주자, 기타리스트), 그리고 자신의 여자친구인 Sabine Mehrbach와 함께 활동했다. 그는 WEA와 계약을 맺고(1973년), 두 번째 앨범 “Bury My Heart At Wounded Knee"를 발표한다. 데뷔앨범과 음악적으로 정반대되는 두 번째 작품에 대하여 Conny Veit는 “나에게 있어서 가사는 음악에서 점점 더 많은 의미를 차지하고 있다. ․․․나의 작품들은 더욱 노래와 같은 성격을 지니게 되었다. ․․․악기들은 ”개방“되야 하며, 가사를 위해서 길을 마련해야 한다”라고 자신의 새로운 음악관을 제시했다. 이 앨범은 미국인 Dee Brown의 책에 기초하고 있으며, America의 원주민들에 대한 추방, 착취, 그리고 전멸당한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다. 세명의 인디언의 이야기들을 다루고 있는 이 앨범은 무엇보다도 Conny Veit의 “영혼의 고통”, “자아실현과 내적인 평안”을 향한 그의 노력을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세상에는 사람들이 좀더 행복하게 살 수 있는 문화사회가 존재한다”라고 말했다. 이 앨범에 대하여 Pop誌는 “무거운 내용의 앨범으로서 깊이 감명을 주는 음악”이라고 평했다. 또한 Sounds誌는 “매우 아름다운 이 앨범의 가사를 It's A Beautiful Day의 것들과 비교될 수 있다”고 평했으며, 여기에 Musik Express誌 “사람들의 머릿속에 위치한 이름으로 남을 훌륭한 음악”이라고 극찬했다. 그러나 Gila는 Conny Veit가 Guru Guru의 멤버로 참가했던 1974년 해체되었다. 그룹 Gila는 짧은 기간동안 존재했었던 전설적인 독일그룹으로 남아있다.

2 UPPh_032.jpg[ | ]

Guru Guru “Mani-Tom" [입으로 불 수 있는 북, 공기를 가득 채우거나 반만 차게해서 소리를 변화시킬 수 있는 북]이란 악기를 발명한 Mani Neumeier는 Bass주자 Uli Trepte와 함께 Free-Jazz 지향의 Trio그룹인 Irene라는 스위스 그룹에서 1967년까지 활약했다. 그후 Neumeier는 거의 1년동안 Schoof - 5중주에서 타악기를 담당했고, 여러차례에 걸쳐 Schlippenbach와 Brotzmann과 함께 공연을 가졌다. 음악적으로 떠돌이 생활만을 해왔던 Mani Neumeier(1940년12월31일생)는 그의 음악적 동반자인 Uli Trepte(Bass)와 함께 새로운, 실험성을 추구하는, 그룹을 구상하게 된다. 그들은 그룹명을 Guru Guru Groove로 정하고 멤버로 Hans Sachs(보컬)를 추가시켰다. 그들이 최초로 대중들에세 모습을 드러낸 것은 1968년 8월 하이델베르크의 Holy Hill Festival의 무대였다. 그해 9월26일, Guru Guru Groove는 Tangerine Dream, Amon Duul과 함께 “Deutschland erwacht-Popmusik aus deutschland Landen(독일 땅에서 Pop Musik이 잠에서 깨어났다)”라는 공연에 출연했고, 3일후 그들은 International Essen Song-Tage에 즈음해서 에센의 Gruga홀에서 연주했다. 그들은 단지, Bass와 타악기만을 사용하여 Free Jazz 경향이 강한 음악을 만들어 냈으며, 때때로 보컬리스트인 Sachs의 보컬도 그들의 음악에 한 몫을 해냈다. 1969년 봄, 그들은 그룹명을 Guru Guru Groove에서 Guru Guru로 짧게 고치고 보컬리스트 Hans Sachs를 내보낸다. 여기에 기타리스트 Eddy Nageli를 받아들임으로서 그들을 더욱 보강시켰다. �은 해 Guru Guru는 또다시 기타주자를 교체하는데, 미국인 Jim Kennedy가 Nageli의 후임으로 참가한다. 당시, Guru Guru는 “Stoned Musik(취한, 정신없이 황홀한 음악)”을 연주햇으며, “청중들을 음악속으로 끌어들여” 그들의 음악여행에 적극 동참할 수 있도록 노력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러한 것을 - 순수한 구조를 통해서 즉, 테마가 없고, 하모니와 틀이되는 박자가 없는 - 즉흥연주를 통하여 실현시키려 했다. 때때로 이들 Trio는 고출력 스피커를 무대 앞에 내놓고 공연을 했는데, 그럴때면 마치 “지옥의 소음”이 개최된 것 같았으며, 그 때문에 그들은 “완전히 시끄러운 그룹(Volldrohn Gruppe)”으로 평판이 났다. Jim Kenndy와는 마지막으로 1970년 4월 21일 베를린의 Pop Festival에서 공연을 가진 Guru Guru는 그후 Agitation Free의 뮤지션인 Ax Genrich를 새로운 기타리스트로 받아드렸다. 당시, 리더였던 Mani Neumeier는 “Ax Genrich와 함께 연주하면서 Rock Music이 감각적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이제까지 만들어왔던 음악과는 다른 새로운 음악을 만들 수 있을 거라는 점을 알았다”라고 Ax Genrich에 대해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1970년 6월 Genrich, Trepte, Neumeier는 첫 번째 앨범 “UFO"를 녹음한다. 여기에서 그들은 “곧 UFO가 착륙하게 될 것이고, 인류는 뛰어난 두뇌와 천성의 종족들과 상면하게 될 것이다(표지글에서)”라고 밝히고 있다. 이 앨범에 대하여 Sounds誌는 “이 작품의 성과는 Cream이 얻은 결과와 비슷한 것이다. 단, Guru Guru는 한걸음 더 앞서고 있으며, 리듬적으로 더 숙달돼 있다”라고 그들의 데뷔앨범을 호평했다.

Guru Guru는 1971년 한해를 Bremer의 “Beatclub"과 WDR-TV의 “Popmusik aus Deutschland” 그리고 함부르크의 Star스튜디오에서 보내게 된다. 이 스튜디오에서 그들은 두 번째 앨범 “Hinten"을 제작한다. 남자의 뒷모습이 그려져 있는 커버의 그림과 담겨있는 짧은 문구에는 “실습가(행동하는 자)는 모든 것을 손으로 말한다... 어린이와 사생아(Kegel: 원뜻은 고드름 남편의 부재중에 사생아를 낳은 부인이 돌아온 남편에게 Kegel(고드름)을 먹었더니 아이가 생겼다고 말하였다는 이야기에서 Kegel이 사생아의 뜻이 됨)는 원칙을 악고 있다...교미된 암새는 무겁지 않다...”라는 내용이 담겨 있다. 이 앨범에는 그들이 데뷔작에서 들려주었던 “Acid-Space-Musik”이 장시간으로 즉흥적으로 연주되고 있다. 이 앨범을 듣고 평론가들은 “이들은 본래가 악연주에 더 통달한 그룹이다... 언어에는 능란하지 못한 이들이 무리하게 가사를 사용하고 있다”라고 입을 모았다.

Guru Guru는 Genrich, Trepte, Neumeier의 Line-Up으로 1971년2월 세 번째 앨범인 “Kanguru”를 녹음했다. 그해 4월, Trepte가 그룹을 떠나고 그이 자리에 Bruno Schaab(Night Sun 출신)가 가입되었다. 1972년도 Sounds誌 인기도 조사에서 “Kanguru”는 Tangerine Dream의 앨범 “Zeit” 다음으로 그해 최고의 앨범 2위로 선정되었고 그해의 Best 그룹속에 Guru Guru가 2위에 올랐다. 1973년초, “Rock'n Roll에 익살스럽게 접근하기 위한 방편으로 제작된 Guru Guru의 네 번째 앨범 “Guru Guru”가 발매되는데, 이 앨범속에는 매우 독특한 “Elektrolurch(전기두꺼비)”라는 곡이 담겨있다. 이 앨범의 홍보공연에서, Guru Guru의 멤버들은 “광대”처럼 Neumeier가 직접 만든 마스크를 쓰고, 레슬러와 같은 백병전(근접전투) 때나 입을만한 바지를 입고 이리저리 뛰어다녔으며, 타악기 둘레를 껑충거리며 뱅뱅돌았는데, 그것은 마치 입맛을 다시며 선교사가 연하게 잘 익을것을 기다리며, 불이 지펴진 가마솥 주변을 뱅뱅도는 식인종의 모습처럼 보였다. 특히, Frankfurt의 “German Rock Super Concert”에서 그들은 화장을 하고 가장복(풍속옷)을 입고 등장했으며, 흘러간 Rock곡들을 메들리로 연주했다. 그리고 공포탄을 발사하기도 했다. 그리고 Krefeld에서의 German-Rock-Festival에서는 드들의 간막 코메디가 커다란 성공을 거두었고 많은 갈채를 받았다. 또한, 8월 도이취란드홀에서 RIAS가 개최한 Deutsch Rock 대회에서 Mani Neumeier는 “나는 오케스트라를 연주하는 것이지 타악기를 연주하는 것이 아니다”라고 말하며 Bruno Schaab를 H문 Harmann과 교체시킨다.

이 세명의 익살군자이자 독일 Rock의 이방인들은 다섯 번째 앨범 “Don't Call Us, We Call You”를 녹음한다. 이 앨범에는 인디언의 우정어린 춤인 “Round Dance”가 들어있는데, 이 곡은 그동안 그룹에 머물렀던 Schoshcon의 모태인 인디안그룹이 남겨준 것이다. WAZ는 이 앨범에 대하여 “섬세하고 예민한 음악... 온전한 기쁨을 주는 음악”이라고 말한 반면, Mani Neumeier는 2년후 설명을 통해 “이 앨범은 잘 되지 않았다... 내 마음에 들지 않는 음악이다”라고 말했다.

1974년 1월, 그룹을 떠난 Ax Genrich 대신 베를린 태생의 페르시아인 Houschang Nejadepour가 가입되었는데, 그는 대학을 나와 Remscheid 아카데미에서 Jazz를 배우고 3년동안 Koln의 Jazz-Rock밴드인 Eiliff에서 연주했던 인물이었다. 그해 2~5월 동안 Guru Guru는 독일순회공연을 갖고 Dortmund의 Pop Festival과 Essen의 Pop Festival에 출연했다. 공연도중인 4월에 그들의 여섯 번째 앨범 “Dance fo the Flames”가 발매되었다. New Musical Express誌는 “완전히 경이로운 음악”이라고 그들의 새로운 작품을 극찬했다. 그해 7월, Houschang Nejadepour가 그룹을 떠나고 그 대신 이전에 Gila의 리더였던 Conny Veit가 참가한다. 당시 Mani Neumeier는 “이번에는 이상적인 팀이다!”라고 즐거워 했으나 Conny Veit는 “이 그룹은 나에게 있어서, 음악적으로 너무나 서투른 졸렬한 것이다.”라고 말했고, 또한 H문 Hartmann의 탈퇴로 인해 Guru Guru는 1974년말 일시 해체되어 버린다. 1~2주간을 고독하게 보낸 독일 Rock의 아버지 Mani Neumeier는 그룹 Kraan, Karthago, Cluster의 절친한 뮤지션들을 스튜디오로 불러들여 Solo앨범인 “Guru Guru Mani und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