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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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BN:8976961005

  • 저자:서중석
  • 원제:한국 현대 민족운동 연구(1996)

역작이다. 조선 사학계의 깊이가 생기는 느낌을 받았다.


'96봉화 95학번 첫번째 세미나

                 한국현대민족운동연구
       1.일제의 한국지배의 성격과 민족문제

1.한국지배의 기본성격
일제의 한국지배는 당시 형성된 좌우익의 성격을 규정짓는 요인으로 크게 작용했기 때문에 이를 파악하여야 그들의 성격과 후에 그들이 행한 태도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기에 반드시 파악하고 넘어가야 할 부분이다.
일제의 한국지배는 여러가지로 특수성을 갖는다. 우리나라는 천년 이상이나 단일민족으로 지내온 독립국가였다. 그리고 일본은 급격히 산업화한 후진 산업국가였다. 따라서 일본은 자신의 발전을 위해서 우리나라를 희생물로 삼았고 그 과정에서 유구한 독립국인 우리나라를 지배하기위해 유래없는 폭압통치를 구사하였다.

2.정치적 지배의 특성과 그것의 정치적 의미
일제의 정치적 지배는 무단강권통치와 군국주의라는 말로 대변되는데 그 근본 이유는 우리나라가 강인한 민족의식을 갖고있는 나라였기 때문이다.
일제는 한일합방을 이루자마자 바로 모든 정치 사회단체의 해산을 지시했다. 심지어 친일단체까지도 해산시켰으며 다시 설립을 허가했더라도 일체의 행동을 차단하였다. 결국 고작해야 소모임 내지는 민족개량단체만이 남아있을 수 있었고 우익은 언론을 중심으로 모였다. 훗날 문화정치기에도 일개 경찰관이 집회를 금지시킬 수 있을정도로 정치활동을 막았다. 이는 당시 인도의 활발한 대중활동에 비해서 터무니없이 열악한 환경이었다. 게다가 마구잡이의 법집행은 무제한적 인권침해를 낳는 상황이었다. 조선 총독부는 거의 전제군주적인 힘을 갖고있었다. 이 역시 다른 식민국들이 나름의 자치권을 획득하던 것에 비해 열악한 상황이었다.
한국인들의 정치참여는 거의 없었으며 있다해도 하층의 단순직에 불과하였다. 한국인을 고용한 곳은 말단 경찰이나 관공리 정도였기때문에 이들은 후에 민중에게 직접적인 반민족행위자로 각인되었다. 특이 군대는 결집하면 직접적인 힘을 확보할 수 있는 곳이었으므로 한국인의 참여는 극히 미미했다. 그나마 이런 극소수의 참여도 3.1 운동 이후에는 거의 일본인들로 대치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대중과 정치조직과의 괴리를 가져왔고 조직들의 분열을 가져왔다. 결집할 수 없었던 여러 조직들은 결국 잠적하여 근근히 맥을 이어오다가 해방 직후에 나타났는데 이러한 상황은 그들을 원리주의자로 만들기 충분했고 이는 해방공간의 혼란했던 정치집단들의 난립을 설명해준다.

3.식민지 수탈체제의 성격과 그것의 민족적 계급적 의미
1)식민지지주제
민족 내의 대립을 더욱 첨예하게 만든 것은 식민지 수탈체제였다.
일제침략기에는 점점 소작농이 늘어갔는데 이는 더욱 수탈이 심해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게다가 경작권의 박탈은 소작민들을 더욱 착취하는 효율적 수단이었다. 경작권을 빈번히 이동시켜서 점차로 농민의 위치를 궁지로 몰아넣은 것이다. 지주들이 해야 할 책임들을 거의 소작민에게 전가시킨 것은 물론 소작료율이 6할에서 9할까지 되었다. 반면 일본인 지주와 소수의 한국인 지주들은 확대 재생산되는 지주소작제에 힘입어 점차 그 세력을 키워가고 있었다. 이들은 일제 지배체제에서 성장하였기 때문에 민족주의적인 입장과는 대립적인 성격을 띠었다.
이러한 성격과 일제의 민족분열책, 코민테른의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노선에 의해 민족모순보다는 계급모순이 부각되었다. 그러나 계급투쟁과 민족해방투쟁은 분리될 수 없는 것이었다. 식민지지주제를 지탱하는 것이 일제였기 때문이다.

2)한국인 부르주아지의 위상
일제는 회사령을 첨병삼아 처음부터 한국자본의 성장을 억압하였다. 몇몇 친일 매판자본가들을 제외하곤 성장에 제한을 받은 한국의 부르주아지들은 때로는 민족주의적 성격을 띠기도 했지만 자본의 논리에 따라 일제의 정책에 따르지 않으면 살아남을 수 없었다. 또 노동계급과의 대립역시 이들을 반민족적 위치에 서게했다. 이들은 그만큼 취약했던 것이다.
몇몇은 삼민주의나 스와라지운동을 모방하고자 했으나 민중과의 괴리때문에 실현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자포적으로 된 이들은 일본에 동화되거나 개량주의에 빠지기도 하였다. 반면 영세한 측은 일본자본이 망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는 생각에 강한 반일감정을 갖고있었다.

으례 그렇듯이 이 시기의 항일민족해방운동자들이 인식하는 방향은 두가지였다. 특수성을 강조하여, 민족국가건설로 일제를 몰아내면 이식자본주의도 무너진다는 입장과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을 통하여 계급모순을 먼저 해결해야한다는 입장이 그것이다. 전자의 경우는 좌우합작을 통한 민족통일전선으로 나타날 수 있었으나 후자의 경우는 원리주의적이어서 민족의식이 결여되기 쉬웠다.

일제의 기형적 식민정책은 우리나라를 철저히 종속시키고 상호 연관성없는 공업정책과 지역적 편중, 기술력 부재등의 문제를 가져와 결국 민족경제 형성에 치명적인 장애를 만들어 놓았다.


3.'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노선과 선 민족국가 건설노선

1.조선공산당의 건설과 8월테제의 성격
조선공산당은 박헌영이 중심이 된 재건파 공산당이 주축이 되어 결성되었다. 이는 재건파가 코민테른의 노선을 비교적 잘 따랐기 때문이다. 또 박헌영이 이끌던 경성콩그룹이 그나마 권위를 갖고있었고 장안파는 급조된 것이었기 때문이라는 것도 한 이유이다. 하지만 공산당은 박헌영계와 비박헌영계로 나뉘어 그리 결집된 모습을 보이지는 못했다.
8월테제는 조선공산당의 기본 노선이 되었으므로 한번쯤 살펴볼 필요는 있다. 그러나 그 구절구절을 해석하는 것은 무의미하고 이 글의 경향이 어떠한가를 아는것이 중요하다. 여기서는 먼저 토지문제의 혁명적 해결이 나와있는데 주된 내용은 자신이 경작하는 토지 외에는 무상몰수 무상분배를 통한 해결이다. 그러나 이는 부르주아민주주의혁명단계에서 나올수 있는것이 아닌 사회주의사회에서나 가능한 발상이며 아마도 소련을 모델로 주장한 듯하다. 따리서 지주 부르주아 계급을 적대시하는데 이 과정에서 개인적인 항일활동등도 전혀 인정하지 않고있다. 또 나름대로 혁명적 사상을 가지고있고 항일경력이 있는 좌파민족주의자, 사회민주주의자들도 배격하였다. 이는 다분히 원리적인 모습이며 또 국공합작을 지지했다는 점에서 모순되는 부분이다. 게다가 이분법적인 모습을 보여 중간단계나 종도적인 모습을 완전히 배제하였다. 또 남북을 이질적인 세력이 분할하고있으므로 민족통일전선의 형성이 아주 시급한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거기에 대해서는 구체적인 모습을 보이지 않는다. 이미 일제가 물러간 뒤임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일제를 제일의 적대세력으로 규정하는 것도 우스운 일이다. 그리고 여전히 연합국에 우호적인 태도를 취하는데 이는 여전히 소련이 연합국을 필요로할 때의 상황으로 착각하고있는 모습이다. 그런데 이와는 또 다르게 실제로 조선공산당은 민족협동전선을 구축하기위해서 나름의 노력을 했다. 이는 조선공산당의 세력이 미약했기때문에 세력확장과 정비를 위해서였던것 같다.
이즈음 소련이 점령한 북쪽에는 나름의 지부가 생겨 남쪽과는 독자적인 방향으로 나아가기 시작했고 장안파공산당은 극좌적 노선에서 갑자기 민족자본가, 임정을 지지하는 모습을 보이고 여운형이 인민당을 결성하는 등 정국은 혼미해져갔다.

2.인민당의 노선
인민공화국에서 민족통일전선형성이 희박해지고 조선공산당이 세력을 강화하자 여운형은 각계각층을 모아 완전한 통일전선을 구축하겠다고 피력하고 인민당을 결성했다. 인민당은 극좌 극우를 모두 경계하는 모습을 보이면서 소수 친일분자를 제외하고는 애국적 자본가와 지주까지도 손을 잡아야한다고 천명했다.
그러나 인민당은 당 내부에 공산주의자가 너무 많았고 여운형이라는 카리스마 외에는 역량이 부족했다. 그리고 조선공산당과 겹치는 조직들도 상당수 있었으며 박헌영의 견제로 조선공산당과의 우호적 관계도 오래 지속되지 못했다.

보론1:미국의 신탁통치 구상과 38선의 성격에 대한 기존 연구의 검토
라고 적혀있지만 그것보다는 단지 당시 열강들의 상황을 간략하게 적어놓은것이다. 이는 지난 TS때의 미소의 대한정책과 유사하다.
루즈벨트가 제시한 신탁통치안은 '이상주의적인 제국주의'라고 할 수 있다. 미국은 당시 식민지가 별로 없었고 따라서 동등한 상황에서라면 영국이나 프랑스보다 유리하였다. 이는 윌슨의 민족 자결주의의 배후에도 숨어있는 논리이다. 따라서 열강들은 반대했고 그래서 다른 심민지에서는 실시되지 못했으나 우리나라는 상황이 달랐다. 게다가 거기에 대해서 소련의 반대도 별로 없었기에 미국의 의도대로 흘러갈 수 있었다.
종전 직전 미국은 소련의 참전을 종용했는데 일본이 너무 빨리 항복하는 바람에 소련군은 미국에 비해 일찍 진주할 수 있었다. 미국은 급한 나머지 38선을 경계로 진주하자고 제안했고 소련은 미국을 거스를 필요가 없어서 동의했다. 또 그 근처까지가 관동군의 관할지역이었으므로 소련도 자연스레 받아들였다. 군사적 편의를 위해서 그어진 것이라고는 했지만 당시는 군사적 점령이 곧 정치적 점령으로 통하던 시기여서 소련과의 타협이 없으면 독립국이 되기는 힘드리라는 것이 충분히 예상되는 시기였다. 미국은 예정대로 신탁통치를 통해서 우리나라를 자신들이 장악하려 하였으나 우리 민중의 반감과 미군정의 태도로 인해 정국은 혼미하게 되어갔다.

보론2:조선공산당의 대중조직활동과 노동자.농민문제.
조공은 처음에는 좌우합작을 모색하다가 후에 태도를 바꾸었는데 이는 자신들의 조직정비가 일단락되었기 때문이었다. 이들은 민족통일전선을 얘기했지만 통일의 대상을 '진보적 민주주의'정당으로 국한시켜 오히려 민족통일전선에 부정적인 태도를 보였다. 일제때에도 꾸준한 활동을 보이던 노동자들은 그중 민첩하게 조직을 정비하여 곧 전평을 결성하였다. 물론 그 배후에는 사회주의자들이 있었다. 해방직후 상황이 어려운 것을 감안하여 파업이나 노동문제는 크게 신경쓰지 않고 조공의 지지세력으로 남아있었다. 전농또한 결성되었는데 이러한 조직들에 힘입에 3.7제를 시행하는 등의 활동을 벌였다. 그러나 조공은 당장 급한 것을 해결하는 것 외에는 어느정도 안정을 모색했다. 전농과 전평은 조공 산하에 있다고 해도 되겠으나 나머지 제 단체들은 범좌익적 성격을 띠고있었다.
해방직후 노농문제보다 더 열악한 것은 경제상황이었다. 자본의 부재, 산업의 지역 편중, 기술미숙, 원료부족 등은 심각한 인플레를 몰고와서 상황이 아주 안좋았다. 쌀소동은 이때를 상징하는 것이다. 게다가 친일관료들이 여전히 남아있는 상태여서 생활고가 점차 심해지자 대중들은 우리가 독립국이 되지 못해서라는 것을 느끼기 시작했다. 이는 점차로 고조되어 정치세력들도 미군정도 감지하고 있었다.


학술분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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