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산 김씨

1 개요[ | ]

광산김씨는 신라 왕자인 흥광(興光)을 시조로 받든다.

왕자께서는 나라가 장차 어지러워질 것을 예지 하시고 무주 서일동 지금의 담양 평장동에

터전을 잡고 살으셨기 때문에 광산(光山)으로 관향(貫鄕)을 삼게 되었다.

아드님 식(軾) 이후 대대로 고려의 높은 벼슬인 평장사(平章事)로 오른 이가 여덟 분이나 되어

동네 이름을 평장동(平章洞)이라고 했다.

그 후손을 크게 문정공 태현(文正公 台鉉), 문숙공 주정(文肅公 周鼎),

양간공 연(良簡公 璉), 사온직장공 영(司醞直長公 英)으로 나누고 있다.

조선에 들어와서 더욱 가문이 번창하고 많은 인물이 배출되어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일컬어졌다.

18세(世) 정(鼎)은 추성보리공신(推誠輔理功臣)으로 중대광대호군(重大匡大護軍)

광성군(光城君)에 오르셨는데 세 아드님이신 관찰사공 약채(觀察使公 若采),

척약재공 약항(惕若齋公 若恒), 직제학공 약시(直提學公 若時)께서 다 과거에 오르셔서 크게 현달하셨고,

약채(若采) 선조께서 조선조 초기에 충청도관찰사를 지내면서

연산(連山)에 자리 잡게 되어 세칭 광김(光金)을 중심으로 한 기호유학(畿湖儒學)의 본거지가 되었다.

약채(若采)의 증손 국광(國光)께서는 적개공신(敵愾功臣) 좌리공신(佐理功臣)이라는

두 개의 공훈(功勳)에 책록(策祿)되고 숭록대부의정부좌의정(崇祿大夫議政府左議政)

광산부원군(光山府院君)으로 책봉(策封)되었으며 경국대전(經國大典)을 지었다.

국광(國光)의 5대손 사계 장생(沙溪 長生) 선생께서 기호유학의 거대한 봉우리를 일으키셨다.

사계는 구봉 송익필(龜峰 宋翼弼), 율곡 이이(栗谷 李珥)의 적전제자(嫡傳弟子)로

성학(聖學), 성리학(性理學), 예학(禮學)에 두루 통달한 거유(巨儒)로 그 학통이 아드님

신독재 집(愼獨齋 集)에게 전해졌고 두 분의 문하(門下)에서 동춘당(同春堂) 송준길(宋浚吉),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 등 우리 역사를 빛낸 큰 학자가 줄을 이어 나와서

드디어 기호학파(畿湖學派)의 거대한 맥을 형성했다.

연산의 돈암서원에 기호학맥(畿湖學脈)의 자취가 남아있다.

광산김씨 가문이 영예로운 것은 우리 역사를 통틀어 으뜸가는 도학자(道學子)

열여덟 분이 오른 국학 성균관(成均館)의 문묘(文廟)에 두 분이 배향(配享) 되었고

특히 부자(父子)분인 사계와 신독재라는 사실과 조선시대 당대 최고의

석학만이 누릴 수 있는 대제학(大提學)을 일곱 분이나 배출한 사실이다.

또 사계 선생의 삼자(三子) 허주 반(虛舟 槃)의 손자인 서포 김만중(西捕 金萬重) 선생께서는

충효 소설 구운몽(九雲夢)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를 지어 우리 문학사를 크게 빛내시었다.

그밖에 정승판서 장군 충신열사는 이루 다 적을 수 없다. 그 대략은 뒷면과 같다.

2 같이 보기[ | ]

3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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