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종환

시인의마을

1 # 저만큼[ | ]

         남산 소월 시비 아래서 파리한 당신과 함께  산유화를
       읽었지. 이것이 이 세상 당신과의 마지막 여행이 될지도        모른다고 나는 쓸쓸히 당신의 손을 잡아 손가락으로  한        소절씩 쉬어 짚으며 저만큼 하고 읽어갔지. 햇살은 우리        의 저만큼 위에 희미하게 떨어져 쌓이고 소월로 시비 아        래 갈꽃이 사위기 전 당신은 저만큼의 거리 위에 뭉게뭉        게 무너져 흩어지고 넓디넓은 세상에 나 혼자 남아 하늘        과 땅의 거리만 늘리어가고 있지.

2 # 섬[ | ]

       당신이 물결이었을 때 나는 언덕이라 했다.        당신이 뭍으로 부는 따스한 바람이고자 했을 때        나는 까마득히 멈추어 선 벼랑이라 했다        어느 때 숨죽인 물살로 다가와        말없는 바위를 몰래몰래 건드려보기도 하다가        다만 용서하면서 되돌아갔었노라 했다        언덕뿐인 뒷모습을 바라보며 당신은 살았다 했다        당신의 가슴앓이가 파리하게 살갗에 배나올 때까지도        나는 깊어가는 당신의 병을 눈치채지 못하였고        어느 날 당신이 견딜 수 없는 파도를 토해 내 등을 때리고        한없이 쓰러지며 밀려가는 썰물이 되었을 때        놀란 얼굴로 내가 뒤돌아보았을 때        당신은 영영 돌아오지 못할 거리로 떠내려가 있었다        단 한 번의 큰 파도로 나는 걷잡을 수 없이 무너져        당신을 따라가다 따라가다        그만 빈 갯벌이 되어 눕고 말았다        쓸쓸한 이 바다에도 다시 겨울이 오고 물살이 치고        돌아오지 못한 채 멈추어 선 나를        세월은 오래도록 가두어놓고 있었다.

3 # 오월 편지[ | ]

       붓꽃이 핀 교정에서 편지를 씁니다        당신이 떠나고 없는 하루 이틀은 한달 두달처럼 긴데        당신으로 인해 비어 있는 자리마다 깊디깊은 침묵이
     앉습니다
       낮에도 뻐꾸기 울고 찔레가 피는 오월입니다        당신 있는 그곳에도 봄이면 꽃이 핍니까        꽃이 지고 필 때마다 당신을 생각합니다        어둠 속에서 하얗게 반짝이며 찔레가 피는 철이면        더욱 당신이 보고 싶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사람은 다 그러하겠지만        오월에 사랑하는 사람을 잃은 이가 많은 이 땅에선        찔레 하나가 피는 일도 예사롭지 않습니다.        이 세상 많은 이들 가운데 한 사람을 사랑하여        오래도록 서로 깊이 사랑하는 일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 생각을 하며 하늘을 보면 꼭 가슴이 메입니다        얼마나 많은 이들이 서로 영원히 사랑하지 못하고        너무도 아프게 헤어져 울며 평생을 사는지 아는 까닭에        소리내어 말하지 못하고 오늘처럼 꽃잎에 편지를 씁니다        소리없이 흔들리는 붓꽃잎처럼 마음도 늘 그렇게 흔들려        오는 이 가는 이 눈치에 채이지 않게 또 하루를 보내고        돌아서는 저녁이면 저미는 가슴 빈자리로 바람이 가득
     가득 몰려옵니다
       뜨거우면서도 그렇게 여린 데가 많던 당신의 마음도        이런 저녁이면 바람을 몰고 가끔씩 이 땅을 다녀갑니까        저무는 하늘 낮달처럼 내게 와 머물다 소리없이 돌아
     가는
       사랑하는 사람이여.

4 # 유월이 오면[ | ]

       아무도 오지 않는 산속에 바람과 뻐꾸기만 웁니다        바람과 뻐꾸기 소리로 감자꽃만 피어납니다        이곳에 오면 수만 마디의 말들은 모두 사라지고        사랑한다는 오직 그 한 마디만 깃발처럼 나를 흔듭니다        세상에 서로 헤어져 사는 많은 이들이 많지만        정녕 우리를 아프게 하는 것은 이별이 아니라 그리움
     입니다
       남북산천을 따라 밀이삭 마늘잎새를 말리며        흔들릴 때마다 하나씩 되살아나는 바람의 그리움입니다        당신을 두고 나 혼자 누리는 기쁨과 즐거움은 모두 쓸
     데없는 일입니다
       떠오르는 아침 햇살도 혼자 보고 있으면        사위는 저녁노을 그림자에 지나지 않습니다        내 사는 동안 온갖 것 다 이룩된다 해도 그것은 반쪼
     가리일 뿐입니다
       살아가며 내가 받는 웃음과 느꺼움도        가슴 반족은 늘 비워둔 반평생의 것일 뿐입니다        그 반쪽은 늘 당신의 몫입니다        빗줄기를 보내 감자순을 아름다운 꽃으로 닦아내는        그리운 당신 눈물의 몫입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지 않고는 내 삶은 완성되어지지 않
     습니다
       당신을 다시 만나야 합니다        살아서든 죽어서든 꼭 다시 당신을 만나야만 합니다.

5 # 인차리5[ | ]

       인차리를 돌아서 나올 때면        못다 이룬 사랑으로 당신이 내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갔듯        나 또한 언젠가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슬픔을 남기고 떠나야 하는 때가 있음을 생각한다        사랑으로 인해 꽝꽝 얼어붙은 강물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풀리지 않으리라        오직 한 번 사랑한 것만으로도 우리가        영원히 사랑해야 한다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으나 확실히 살아 있는 것들이        이 세상엔 있음을 믿기 때문이다        언젠가 한 번은 꼭 다시 만나야 하는 그날        우리 서로 무릎을 꿇고 낯익은 눈물 닦아주며        기쁨과 서러움으로 조용히 손잡아야 할        그때까지의 우리의 사랑을 생각하는 때문이다.

6 # 우산[ | ]

       혼자 걷는 길 위에 비가 내린다        구름이 끼인 만큼 비는 내리리라        당신을 향해 젖으며 가는 나의 길을 생각한다        나도 당신을 사랑한 만큼        시를 쓰게 되리라        당신으로 인해 사랑을 얻었고        당신으로 인해 삶을 잃었으나        영원한 사랑만이        우리들의 영원한 삶을        되찾게 할 것이다        혼자 가는 길 위에 비가 내리나        나는 외롭지 않고        다만 젖어 있을 뿐이다        이렇게 먼 거리에 서 있어도        나는 당신을 가리는 우산이고 싶다        언제나 하나의 우산 속에 있고 싶다.

7 # 사랑방 아주머니[ | ]

       죽으믄 잊혀지까 안 잊혀지는겨        남덜이사 허기 좋은 말로        날이 가고 달이 가믄 잊혀진다 허지만        슬플 때는 슬픈 대로 기쁠 때는 기쁜 대로        생각나는겨        살믄서야 잘살았던 못살았던        새끼 낳고 살던 첫사람인디        그게 그리 쉽게 잊혀지는감        나도 서른둘에 혼자 되야서        오남매 키우느라 안 해본 일 ㄳ어        세상은 달라져서 이전처럼        정절을 쳐주는 사람도 ㄳ지만        바라는 게 있어서 이십 년 홀로 산 건 아녀        남이사 속맴을 어찌 다 알것는가        내색하지 않고 그냥 사는겨        암 쓸쓸하지. 사는 게 본래 조금은 쓸쓸한 일인겨        그래도 어쩌것는가. 새끼들 땜시도 살어야지        남들헌티사 잊은 듯 씻은 듯 그렇게 허고        그냥 사는겨        죽으믄 잊혀지까 안 잊혀지는겨.

8 #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 ]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조용히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자연의 하나처럼 사랑한다는 것입니다
서둘러 고독에서 벗어나려 하지 않고
기다림으로 채워간다는 것입니다
비어 있어야 비로소 가득해지는 사랑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아침을 맞는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잃는 것은
몸 한쪽이 허물어지는 것과 같아
골짝을 빠지는 산울음 소리로
평생을 떠돌고도 싶습니다
그러나 사랑을 흙에 묻고
돌아보는 이 땅 위에
그림자 하나 남지 않고 말았을 때
바람 한 줄기로 깨닫는 것이 있습니다

이 세상 사는 동안 모두 크고 작은 사랑의 아픔으로
절망하고 뉘우치고 원망하고 돌아서지만
다시 비워두는 마음으로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찢긴 가슴은
사랑이 아니고는 아물지 않지만
사랑으로 잃은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찾아지지 않지만
사랑으로 떠나간 것들은
사랑이 아니고는 다시 돌아오지 않지만

비우지 않고 어떻게 우리가
큰 사랑의 그 속에 들 수 있습니까
한 개의 희고 깨끗한 그릇으로 비어 있지 않고야
어떻게 거듭거듭 가득 채울 수 있습니까

영원히 사랑한다는 것은
평온한 마음으로 다시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9 # 봉숭아[ | ]

       우리가 저문 여름 뜨락에        엷은 꽃잎으로 만났다가        네가 내 살 속에 내가 네 꽃잎 속에        서로 붉게 몸을 섞었다는 이유만으로        열에 열 손가락 핏물이 들어        네가 만지고 간 가슴마다        열에 열 손가락 핏물 자국이 박혀        사랑아 너는 이리 오래 지워지지 않는 것이냐        그리움도 손끝마다 핏물이 배어        사랑아 너는 아리고 아린 상처로 남아 있는 것이냐

10 # 김선생의 분재[ | ]

       연말정리를 하다 교무실 창 밖을 바라본다        모과나무숲 사이에서 놀고 있는 아이들의        해사한 얼굴 위에 겨울 햇살이 매끄럽다        김선생은 철쭉 한 그루를 화분에 옮겨 심고        가지마다 굵은 철사를 동여매어        꺾이지 않을 만큼 이리 비틀고 저리 틀어        비는 시간마다 분재를 만든다        모두들 모여 서서 잘 되었다 잘 되었다고 한다        이 달이 가면 또 한 해가 저문다        모두들 잘 되었다 잘 되었다 할 것이다        모과나무 사이에서 쏟아질 듯 웃던 아이들을        급하게 불러들이는 종소리가 울려온다.

11 #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 ]

       저녁숲에 내리는 황금빛 노을이기보다는        구름 사이에 뜬 별이었음 좋겠어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버드나무 실가지 가볍게 딛으며 오르는 만월이기보다는        동짓날 스무날 빈 논길을 쓰다듬는 달빛이었음 싶어.
       꽃분에 가꾼 국화의 우아함보다는        해가 뜨고 지는 일에 고개를 끄덕일 줄 아는 구절초이
     었음 해.
       내 사랑하는 당신이 꽃이라면        꽃 피우는 일이 곧 살아가는 일인        콩꽃 팥꽃이었음 좋겠어.
       이 세상의 어느 한 계절 화사히 피었다        시들면 자취 없는 사랑 말고        저무는 들녘일수록 더욱 은은히 아름다운        억새풀처럼 늙어갈 순 없을까        바람 많은 가을 강가에 서로 어깨를 기댄 채
       우리 서로 물이 되어 흐른다면        바위를 깎거나 갯벌 허무는 밀물 썰물보다는        물오리떼 쉬어가는 저녁 강물이었음 좋겠어        이렇게 손을 잡고 한세상을 흐르는 동안        갈대가 하늘로 크고 먼 바다에 이르는 강물이었음 좋
     겠어.

12 # 이별[ | ]

       당신이 처음 내 곁을 떠났을 대        나는 이것이 이별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당신이 내 안에 있고        나 또한 언제나 당신이 돌아오는 길을 향해 있으므로        나는 헤어지는 것이라 생각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자꾸 함께 있지 못하는 시간이 길어지
     면서
       나는 이것이 이별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별은 떠날 때의 시간이 아니라        떠난 뒤의 길어지는 시간을 가리키는 것인가 합니다.        당신과 함께 일구다 만 텃밭을        오늘도 홀로 갈다 돌아옵니다.        저물어 주섬주섬 짐을을 챙겨 돌아오면서        나는 아직도 당신이 돌아오기를 기다립니다.        당신이 비록 내 곁을 떠나 있어도        떠나가던 때의 뒷모습으로 서 있지 않고        가다가 가끔은 들풀 사이에서 뒤돌아보던 모습으로        오랫동안 내 뒤를 지켜보고 있으리라 생각합니다.        헤어져 있는 시간이 이렇게 길어가도        이 세상이 다 저물기 전의 어느 저녁        그 길던 시간은 당신으로 인해        한순간에 메꾸어질 것임을 믿고 있습니다.

13 # 사랑의 길[ | ]

       나는 처음 당신의 말을 사랑하였지        당신의 물빛 웃음을 사랑하였고        당신의 아름다움을 사랑하였지        당신을 기다리고 섰으면        강끝에서 나뭇잎 냄새가 밀려오고        바람이 조금만 빨리 와도        내 몸은 나뭇잎 소리를 내며 떨렸었지        몇 차례 겨울이 오고 가을이 가는 동안        우리도 남들처럼 아이들이 크고 여름 숲은 깊었는데        뜻밖에 어둡고 큰 강물 밀리어 넘쳐        다가갈 수 없는 큰물 너머로        영영 갈라져버린 뒤론        당신으로 인한 가슴아픔과 쓰라림을 사랑하였지        눈물 한방울까지 사랑하였지        우리 서로 나누어 가져야 할 깊은 고통도 사랑하였고        당신으로 인한 비어 있음과        길고도 오랠 가시밭길도 사랑하게 되었지.

14 # 귀가[ | ]

언제부터인가 우리가 만나는 사람들은 지쳐 있었다
모두들 인사말처럼 바쁘다고 하였고
헤어지기 위한 악수를 더 많이 하며
총총히 돌아서 갔다
그들은 모두 낯선 거리를 지치도록 헤매거나
볕 안 드는 사무실에서
어두워질 때까지 일을 하였다
부는 바람 소리와 기다리는
사랑하는 이의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고
지는 노을과 사람의 얼굴이
제대로 보이지 않게 되었다
밤이 깊어서야 어두운 골목길을 혼자 돌아와
돌아오기가 무섭게 지쳐 쓰러지곤 하였다
모두들 인간답게 살기 위해서라 생각하고 있었다
우리의 몸에서 조금씩 사람의 냄새가
사라져가는 것을 알면서도
인간답게 살 수 있는 터전과
인간답게 살 수 있는 시간을
벌기 위해서라 믿고 있었다
그러나 오늘 쓰지 못한 편지는
끝내 쓰지 못하고 말리라
오늘 하지 않고 생각 속으로 미루어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결국 생각과 함께 잊혀지고
내일도 우리는 여전히 바쁠 것이다
내일도 우리는 어두운 골목길을
지친 걸음으로 혼자 돌아올 것이다


 

충북대 국어교육과 및 동대학원 졸업
1984년 동인지 『분단시대』 제1집에 「고두미 마을에서」 등 5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문단에 나옴
1985년 첫시집 『고두미 마을에서』 간행 이후 『접시꽃 당신』 (1986), 『내가 사랑하는 당신은』 (1988), 『지금 비록 너희 곁을 떠나지만』 (1989), 『당신은 누구십니까』 (1993), 『부드러운 직선』 (1998) 간행
1990년 제8회 신동엽창작기금을 받음
산문집 『지금은 묻어둔 그리움』 간행
1991년 시선집 『울타리꽃』 간행 ||


시인의마을

문서 댓글 ({{ doc_comments.length }})
{{ comment.name }} {{ comment.created | snstim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