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경림

시인의마을

1 # 먹다 남은 배낭 속 반 병의 술까지도[ | ]

에메랄드 깔린 대로는 아닐 거야,
장미로 덮인 꽃길도 아니겠지,
진탕도 있고 먼지도 이는 길을
이 세상에서처럼 터덜터덜 걸어가겠지,
두런두런 사람들 지껄이는 소리 들리고
굴비 굽는 비릿한 냄새 풍기는 골목을.
잊었을 거야 이 세상에서의 일은,
먹다 남은 배낭 속 반 병의 술까지도.
무언가 조금은 슬픈 생각에 잠겨서,
또 조금은 즐거운 생각에 잠겨서,
조금은 지쳐서 이 세상에서처럼.

2 # 새벽 이슬에 떠는 그 꽃들[ | ]

오래 전에 잊혀진 고도
허물어진 성문 아래 좌판을 차리리
금잔화와 맨드라미와 과꽃
씨앗 몇 봉지 놓고.
진종일 기다리면 먼데 사는
두메 늙은이 하나 찾지 않으랴.
풍습도 말도 다른 늙은이의 손에 들린
꽃씨를 좇아 나도 가야지
낡은 내 몸에서 시원스레 빠져나와서.

절뚝이는 늙은이의 그림자도 되고
벗도 되고 심술도 되어
한 해쯤 울안 울밖을 맴돌다 보면
봉창 밑 작은 뜰에 꽃들이 피어나겠지.
나는 슬퍼하지 않으리
내가 돌아가 들어앉을 몸이 어느새
지상에서 사라져 없다 하더라도.
새벽 이슬에 떠는 그 꽃들 이미
아름다운 내 집이 되어 있으리.

3 # 갈대[ | ]

언제부턴가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울고 있었다.
그런 어느 밤이었을 것이다. 갈대는
그의 온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을 알았다.
바람도 달빛도 아닌 것.
갈대는 저를 흔드는 것이 제 조용한 울음인 것을
까맣게 몰랐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란 것을
그는 몰랐다.

4 # 비오는 날[ | ]

       물 묻은 손바닥에        지난 십년 고된 우리의 삶이 맺혀        쓰리다
       이 하루나마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아내의 죽음 위에 돋은        잔디에 꿇어앉다
       왜 헛됨이 있겠느냐        밤마다 당신은 내게 와서 말했으나        지쳤구나 나는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비틀대는 걸음        겁먹은 목청이 부끄러워        우산 뒤에 몸을 숨기고
       소매끝에 밴 땟자국을 본다        내 둘레에 엉킨        생활의 끄나불을 본다
       삶은 고달프고        올바른 삶은 더욱 힘겨운데
       힘을 내라 힘을 내라고        오히려 당신이 내게 외쳐대는        이곳 국망산 그 한골짜기 서러운 무덤에        종일 구질구질 비가 오는 날
       이 하루나마 지쳐 쓰러지려는 몸을 세워        마음놓고 통곡하리라

5 # 달넘세*[ | ]

       넘어가세 넘어가세        논둑밭둑 넘어가세        드난살이 모진 설움        조롱박에 주워담고        아픔 깊어지거들랑        어깨춤 더 흥겹게        넘어가세 넘어가세        고개 하나 넘어가세        얽히고 설킨 인연        명주 끊듯 끊어내고        새 세월 세 세상엔        새 인연이 있으리니        넘어가세 넘어가세        언덕 다시 넘어가세        어르고 으르는 말        귓전으로 넘겨치고        으깨지고 깨어진 손        서로 끌고 잡고 가세        넘어가세 넘어가세        크고 큰 산 넘어가세        버릴 것은 버리고        챙길 것은 챙기고        디딜 것은 디디고        밟을 것은 밟으면서        넘어가세 넘어가세        세상 끝까지 넘어가세
    • 달넘세:흔히 '달람새'라고도 하는데 경북 영덕 지방에서 하 는 여인네들의 놀이 '월워리 청청'의 한 대목으로, 손을 잡고 빙 둘러앉아 하나씩 넘어가면서 '달 넘세' 노래를 부름. '달 을 넘어가자'는 뜻의 '달 넘세'는 어려움을 극복해가는 일을 상징한다고 함.

6 # 언덕길을 오르며[ | ]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백두산까지 가겠지.        머리에 하얀 눈 뒤집어쓰고        두 동강난 내 땅        눈물로 굽어보고 서 있는        백두산까지 가겠지.        더러운 것 온갖 먼지에 쓰레기        총이며 칼 따위까지도        몸 한번 크게 흔들어        털어 버리고 싶어 몸살난        백두산까지 가겠지.        산자락에 호랑이며 곰도 기르고        바위 틈서리에 푸섶에        새며 벌레도 키우면서        잘린 허리 다시 아물 날        이빨 악물고 손꼽아 보는,        턱 아래 산마을에서        멀리 제주 갯마을까지        보듬고 싶어        어루만지고 싶어        밤낮으로 눈물 마를 날 없는,        이 언덕길 따라 올라가면        그 백두산까지 가겠지.

7 # 산에 대하여[ | ]

       산이라 해서 다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다 험하고 가파른 것은 아니다        어떤 산은 크고 높은 산 아래        시시덕거리고 웃으며 나즈막히 엎드려 있고        또 어떤 산은 험하고 가파른 산자락에서        슬그머니 빠져 동네까지 내려와        부러운 듯 사람사는 꼴을 구경하고 섰다        그리고는 높은 산을 오르는 사람들에게        순하디순한 길이 되어 주기도 하고        남의 눈을 꺼리는 젊은 쌍에게 짐즛        따뜻한 사랑의 숨을 자리가 돼주기도 한다.        그래서 낮은 산은 내 이웃이던        간난이네 안방 왕골자리처럼 때에 절고        그 누더기 이불처럼 지린내가 배지만        눈개비나무 찰피나무며 모싯대 개쑥에 덮여        곤줄박이 개개비 휘파람새 노랫소리를        듣는 기쁨은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들이 서로 미워서 잡아죽일 듯        이빨을 갈고 손톱을 세우다가도        칡넝쿨처럼 머루넝쿨처럼 감기고 어울어지는        사람사는 재미는 낮은 산만이 안다        사람이 다 크고 잘난 것만이 아니듯        다 외치며 우뚝 서 있는 것이 아니듯        산이라 해서 모두 크고 높은 것은 아니다        모두 흰 구름을 겨드랑이에 끼고        어깨로 바람 맞받아치며 사는 것은 아니다

8 # 파도 -여의도의 농민시위를 보며[ | ]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가        저 바다 언제까지나        잠들어 있으리라 생각했으니.        얼마나 황홀한 일인가        저 파도 일제히 일어나        아우성치고 덤벼드는 것 보면.        얼마나 신바람나는 일인가        그 성난 물결 단번에        이 세상의 온갖 더러운 것        씻어내리리 생각하면.

9 # 莊子*를 빌려 -원통에서[ | ]

       설악산 대청봉에 올라        발 아래 구부리고 엎드린 작고 큰 산들이며        떨어져나갈까봐 잔뜩 겁을 집어 먹고        언덕과 골짜기에 바짝 달라붙은 마을들이며        다만 무릎께까지라도 다가오고 싶어        안달이 나서 몸살을 하는 바다를 내려다보니        온통 세상이 다 보이는 것 같고        또 세상살이 속속들이 다 알 것도 같다        그러다 속초에 내려와 하룻밤을 묵으며        중앙시장 바닥에서 다 늙은 함경도 아주머니들과        노령노래 안주해서 소주도 마시고        피난민 신세타령도 듣고        다음날엔 원통으로 와서 뒷골목엘 들어가        지린내 땀내도 맡고 악다구니도 듣고        싸구려 하숙에서 마늘장수와 실랑이도 하고        젊은 군인부부 사랑싸움질 소리에 잠도 설치고 보니        세상은 아무래도 산 위에서 보는 것과 같지만은 않다        지금 우리는 혹시 세상을        너무 멀리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너무 가까이서만 보고 있는 것은 아닐까
  • {莊子} 秋水篇에 '大知觀於遠近'이라는 글귀가 있음.

10 # 나무 1 -지리산에서[ | ]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반듯하게 잘 자란 나무는        제대로 열매를 맺지 못한다는 것을        너무 잘나고 큰 나무는        제 치레하느라 오히려        좋은 열매를 갖지 못한다는 것을        한 군데쯤 부러졌거나 가지를 친 나무에        또는 못나고 볼품없이 자란 나무에        보다 실하고        단단한 열매가 맺힌다는 것을
       나무를 길러본 사람만이 안다        우쭐대며 웃자란 나무는        이웃 나무가 자라는 것을 가로막는다는 것을        햇빛과 바람을 독차지해서        동무 나무가 꽃 피고 열매 맺는 것을        훼방한다는 것을        그래서 뽑거나        베어버릴 수밖에 없다는 것을        사람이 사는 일이 어찌 꼭 이와 같을까만

11 # 농무[ | ]

농무


 

1960년 동국대학교 영문과 졸업
1955∼1956년 《문학예술》에 이한직의 추천을 받아 시 《낮달》 《갈대》 《석상》 등을 발표하여 등단
1973년 제1회 만해문학상 수상
1981년 제8회 한국문학작가상 수상
시집 : 《새재》(1979), 《달넘세》(1985), 《남한강》(1987), 《우리들의 북》(1988), 《길》(1990) 등
평론 : 《농촌현실과 농민문학》(1972), 《삶의 진실과 시적 진실》(1982), 《역사와 현실에 진지하게 대응하는 시》(1984), 《민요기행》(1985), 《우리 시의 이해》(1986) 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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