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규원

시인의마을

1 # [꽃]의 패로디[ | ]

       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 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왜곡될 순간을 기다리는 기다림        그것에 지나지 않았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내가 부른 이름대로 모습을 바꾸었다.
       내가 그의 이름을 불렀을 때        그는 곧 나에게로 와서        풀, 꽃, 시멘트, 길, 담배꽁초, 아스피린, 아달린이 아닌        보통명사나 수명사가 아닌        의미의 틀을 만들었다.
       우리들은 모두        명명하고 싶어했다.        너는 나에게 나는 너에게.
       그리고 그는        그대로 의미의 틀이 완성되면        다시 다른 모습이 될 그 순간        그리고 기다림 그것이 되었다.

2 # 마음이 가난한 者[ | ]

       성경에 가라사대 마음이 가난한 者에게 福이 있다 하였느니
       2백억을 축재한 사람보다 1백 9십 9억을 축재한 사람은 그
     만큼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1백 9십 9억원 축재한 사람보다 1백 9십 8억을 축재한 사
     람 또한 그만큼 더 마음이 가난하였으므로
       天國은 그의 것이요
       그보다 훨씬 적은 20억원이니 30억원이니 하는 규모로 축
     재한 사람은 다른 사람과는 비교가 안 될 만큼 마음이 가난하      였으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돈 이야기로 詩라고 써놓고 있는 나는 어느 시대의 누구보
     다도 궁상맞은 시인이므로
       天國은 얻어놓은 堂上이라

3 # 우리집 아이의 장난[ | ]

       우리집 작은놈이 뜰에 둥그렇게 원을 그려놓고 날더러 들
     어가 보라고 합니다. 선 속에 내가 발을 들여놓으니까 녀석      은 낄낄 웃으며 이젠 갇혔다고 박수를 칩니다. 나는 녀석의      실없는 장난을 웃으면서 한 발을 선 밖으로 내디딥니다. 순      간, 왼쪽 무릎이 짜릿하며 마비가 옵니다. 놀란 내가 발을       거두며 작은놈을 쳐다보니 녀석은 마음놓고 빙그레 웃습니다.      이번에는 오른쪽 발을 조심스럽게 선 밖으로 옮겨 봅니다.      선을 넘기도 전에 이상한 마비 증상이 오른쪽 허벅지를 타고      싸아 하고 올라 옵니다. 멍해진 나는 선의 속을 들여다봅니      다. 선의 冷血性, 확실함, 이의 없음, 일사불란함이 일렬로      서서 나를 향하고 있습니다. 나는 우뚝 선 채 선과 쾌재를      부르는 녀석의 손뼉 소리 속으로 녀석의 다음 할일을 재빨리      읽어 봅니다. 아니나다를까 녀석이 그려놓은 선의 한 쪽을      잡아당기니까 선이 슬금슬금 나의 다리를 향하여 좁아듭니다.
       당신의 믿음 또는 당신의 고정 관념이 그렇게 믿으므로 선
     은 그렇게 언제나 당신이 아는 선으로 있으려니 하지만
       그것은 당신의 病입니다
       믿음 또는 고정 관념이란.        보십시오, 선은 움직입니다        존재하는 그때의 양식 그만큼        누가 움직이고 있는 그만큼.

4 # 우리들의 어린 王子[ | ]

       뒷집 타일 工場의 경식이에게 동그라미를 그려 보였더니 동
     그라미라 하고
       연탄 장수 金老人의 손주 명하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하고        K식품 회사 손계장의 딸 연희는 빵을 보고 빵이라 하고 연
     희 동생 연주는
       돼지새끼를 보고 돼지새끼라고 했다.
       다시 한번 물어 봐도 경식이는        동그라미를 동그라미라 하고        명하는 쓰레기를 쓰레기라 하고        연희는 빵이라 하고 연주는 돼지새끼라 한다.        또 다시 물으니 묻는 내가 우습다고 히히닥하며        나를 피해 다른 골목을 찾는다.
       정답 만세!        그리고 정답 아닌 다른 대답을 못 하는        우리들 어린 王子와 公主에게 만세 부르는 우리 어른들
     만세!

5 # 70년대의 流行歌[ | ]

       우리가 만난 것은 안개 속에서였다. 그리고 우리가 처음 마
     주친 것도 안개였고 겨울이었다. 겨울은 숨어서 세계를 氷點      下로 끌어내리고 안개는 끌려가는 즉시 가볍게 얼어서 돌아      왔다. 안개는 였고 였고 이었다. 몇몇은 氷      點下로 돌아온 그것들 위에 보란 듯이 放尿했다. 나는 그들을      보며 낄낄 웃었다. 그러나 그 웃음 소리는 옆의 사람에게 가      기도 전에 얼어붙어서 안개와 합류했다. 간혹 내 발 앞에 떨어      지기도 했다.
       우리에게 안개는 그 자체가 길이었다. 벽과 안개에 미친
     우리들. 안개는 손과 손을 잡고 가는 우리들을 잡은 손만 남      기고 모두 지워 버렸다. 얼굴이 없는 손과 손의 행렬. 외로운      우리는  또는 이라던 流行歌를 만들어 때없이 불      렀다. 流行歌는 부르는 대로 안개가 되어 되돌아왔다. 얼굴      을 볼 수 없으므로 우리는 되돌아가 버린 사람들도 옆에 있으      리라 믿었다. 아는 것은 안개뿐. 돌아가 버린 사람들의 자리      는 다시 깨어나지 않았다. 다시 깨어나지 않도록 겨울은 白      痴의 이불을 두껍게 내려깔았다. 겨울은 갈수록 하얗게 눈으      로 덮이기 시작했다.

6 # 그 말 그대로[ | ]

       사랑하는 사람에게 우리는 모두        사랑이라는 말 하나로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한다.        사랑하는 사람이 바뀌어도        그 말을 그대로 옮겨        사랑한다, 사랑한다고 한다.
       그래서 자유는 신성하고 봄은        잔인하다.        다방에서 레지를 기쁘게 하는 가장        좋은 方法을 알고 있는데, 그것은        그녀의 옆구리를 슬쩍 건드리며        귀에다 대고 <사랑해!> 하는 일이다.        나는 지금 사랑을 말하고 있지만 사실은 사랑이 숨긴        섬세한 아픔을 얘기하고 있다고        믿어도 좋다        李成桂나 高宗이 龍布를 걸치고 높은 자리에 앉아        그들의 마누라나 宮女에게 윙크했을 모습은        나를 항상 행복하게 한다.
       나를 항상 행복하게 한다.        解放直後 엉망인 인쇄술과 맞춤법이.        昭和 13年의 우리나라 構文이        당당한 얼굴을 할 때는 이유가 있다.        사랑이 수천년 동안 말해지고, 또 사랑이        오고가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이        인간 앞에 아직도 신선한 것은        인간이 사랑 속에 숨겨놓은 게 있기 때문이지만,
       사랑하는 사람의 이름으로 우리 모두 사랑을 말하듯        우리 모두 자기의 이름을 사랑으로 말하는 게 가능한 것도        사랑의 숨김 때문이지만,        말해보아라 너는 무엇을 숨겨 두었느냐        사랑아, 너는 무엇을 숨겨 두었느냐.

7 # 살풀이[ | ]

       길 위에 길 있고        길 위에 또 길 있어        -그럼, 그렇지
       그 길로 내 가 보니        말뚝이 하나        -그럼, 그렇지
       나보다 먼저 와        앞산이 가깝네        -그거, 안됐군
       꿈 위에 꿈 있고        꿈 위에 또 꿈 있어        -그럼, 그렇지
       그 꿈을 쌓다 보니        밤이 다 모자라네        -그럼, 그렇지
       그 꿈을 쌓다 보니        짠지맛이 다 가네        -그거, 안됐군

8 # 분식집에서[ | ]

바닥에게는 낮은 창문도
희망이고

몸이 무거운 나무에게는 떨어지는
잎 하나도 기쁨이다

층계 위에 오래 앉아 있은 나는
내려가는 것이 희망이고

엊저녘에 산부인과에 가서 낙태수술을 하고 지금은 분식집 라면을 먹고 앉아 있는 아이와, 어제까지 몰랐던 여자와 아침까지 자고 지금은 분식집에서 라면을 먹고 있는 아이와,
그러고도 아직 사랑에 굶주린

이 아이들의 공복으로 배가 접혀오는 내 머리위의 도시에 그늘을 펴고 있는 라일락의 꿈이 당신은 꽃을 피우는 일이라고 쉽게 짐작하겠지만 그러나 사실을 말하면 라일락의 꿈은
시든 꽃을 흔들어버릴 4월의 바람이고
바람도 아니부는 4월의 봄은
꽃피는 절망이다.

9 # 한 잎의 여자[ | ]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한 잎같이 쬐그만 여자, 그 한 잎의 여자를 사랑했네. 물푸레나무 그 한 잎의 솜털, 그 한 잎의 맑음, 그 한 잎의 영혼, 그 한 잎의 눈, 그리고 바람이 불면 보일 듯 보일 듯한 그 한 잎의 순결과 자유를 사랑했네.

정말로 나는 한 여자를 사랑했네. 여자만을 가진 여자, 여자 아닌 것은 아무것도 안 가진 여자, 여자 아니면 아무것도 아닌 여자, 눈물 같은 여자, 슬픔 같은 여자, 병신 같은 여자, 시집 같은 여자, 그러나 영원히 가질 수 없는 여자, 그래서 불행한 여자.

그러나 영원히 나 혼자 가지는 여자, 물푸레나무 그림자 같은 슬픈 여자.

10 # 아이와 망초[ | ]

길을 가던 아이가 허리를 굽혀
돌 하나를 집어 들었다
돌이 사라진 자리는 젖고
돌 없이 어두워졌다
아이는 한 손으로 돌을 허공으로
던졌다 받았다를 몇 번
반복했다 그때마다 날개를
몸속에 넣은 돌이 허공으로 날아올랐다
허공은 돌이 지나갔다는 사실을
스스로 지웠다
아이의 손에 멈춘 돌은
잠시 혼자 빛났다
아이가 몇 걸음 가다
돌을 길가에 버렸다
돌은 길가의 망초 옆에
발을 몸속에 넣고
멈추어 섰다

11 # 門[ | ]

어느 집에나 문이 있다
우리 집의 문 또한 그렇지만
어느 집의 문이나
문이 크다고 해서 반드시
잘 열리고 닫힌다는 보장이 없듯

문은 열려 있다고 해서
언제나 열려 있지 않고
닫혀 있다고 해서
언제나 닫혀 있지 않다

어느 집에나 문이 있다
어느 집의 문이나 그러나
문이라고 해서 모두 닫히고 열리리라는
확증이 없듯

문이라고 해서 반드시
열리기도 하고 또 닫히기도 하지 않고
또 두드린다고 해서 열리지 않는다

어느 집에나 문이 있다
어느 집이나 문은
담이나 벽을 뚫고 들어가
담이나 벽과는 다른 모양으로
자리잡는다

담이나 벽을 뚫고 들어가
담이나 벽과 다른 모양으로
자리잡기는 잡았지만
담이나 벽이 되지 말라는 법이나
담이나 벽보다 더 든든한
문이 되지 말라는 법은 없다

12 # 이 시대의 죽음 또는 우화[ | ]

죽음은 버스를 타러 가다가
걷기가 귀찮아서 택시를 탔다

나는 할 일이 많아
죽음은 쉽게
택시를 탄 이유를 찾았다

죽음은 일을 하다가 일보다
우선 한 잔 하기로 했다

생각해 보기 전에 우선 한 잔 하고
한 잔 하다가 취하면
내일 생각해 보기로 했다

내가 무슨 충신이라고
죽음은 쉽게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이유를 찾았다

술을 한 잔 하다가 죽음은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것도
귀찮아서
내일 생각해 보기로 한 생각도
그만두기로 했다

술이 약간 된 죽음은
집에 와서 TV를 켜놓고
내일은 주말 여행을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건강이 제일이지―
죽음은 자기 말에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두어 번 끄덕이고는
그래, 신문에도 그렇게 났었지
하고 중얼거렸다

13 # 비가와도 젖는 자는 - 순례1[ | ]

강가에서
그대와 나는 비를 멈출 수 없어
대신 추녀 밑에 멈추었었다
그후 그 자리에 머물고 싶어
다시 한번 멈추었었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강은 젖지 않는다. 오늘도
나를 젖게 해놓고, 내 안에서
그대 안으로 젖지 않고 옮겨가는
시간은 우리가 떠난 뒤에는
비 사이로 혼자 들판을 가리라

혼자 가리라, 강물은 흘러가면서
이 여름을 언덕 위로 부채질해 보낸다.
날려가다가 언덕 나무에 걸린
여름의 옷 한자락도 잠시만 멈문다

고기들은 강을 거슬러올라
하늘이 닿는 지점에서 일단 멈춘다
나무, 사랑, 짐승 이런 이름 속에
얼마 쉰 뒤
스스로 그 이름이 되어 강을 떠난다.

비가 온다, 비가 와도
젖은 자는 다시 젖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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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아대 법대 졸업
현재 서울예전 문예창작과 교수
1968년 을 통해 등단
시집 : <분명한 사건> <왕자가 아닌 한 아이에게> <이 땅에 씌어지는 서정시> <가끔은 주목받는 生이고 싶다> <사랑의 감옥> 등
시론집 : <현실과 극기> <언어와 삶> 등
1982년 현대문학상 수상
1989년 연암문학상 수상 ||


시인의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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