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잡생각 - 백두대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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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잡생각 - 백두대간
  • 2024-03-08 jjw

내 기억에 모든 것은 90년대 중반에 시작되었다. 경제 고도 성장의 끝물이었고 민주화의 열기가 뜨거웠으며 아직 국제금융위기를 맞기 전이었던 그 때 사회는 자신감에 넘쳐있었다. 그 때 누군가 나서서 "일제"의 개념인 산맥은 문제가 많다며 백두대간을 들고 나왔다.

이른바 "쇠말뚝" 운운도 당시 즈음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지상파 방송사가 앞다투며 보도하였고 그때까진 전혀 보이지 않던 그 많은 쇠말뚝이 이산 저산 여기 저기서 샘솟듯 나왔다. 그런 일이 있기 전까지 누구도 쇠말뚝이 있는 지, 있으면 그게 무슨 문제가 되는 지를 따지는 사람은 없었지만, 일단 보도가 시작되자 "간악한" 일제의 만행은 끝도 없어 보였다.

이제 와서 생각해 보면, 상당수의 쇠말뚝은 자작극이었거나 오해였을 것이다. 그 외에 생각해 볼 수 있는 건 지도 제작을 위해 세워 놓은 원표를 무언가 초자연적인 것으로 착각했을 수 있다. 항공 및 위성 측정이 없던 시기 지도 제작은 삼각측량에 의존했는데, 이를 위해 전국에 수 많은 원표를 세웠다. 물론 일제 시기 세운 것도 있지만 많은 수는 해방 이후 세워진 것이다.

한국의 근대적 지도제작을 위한 삼각측량 원점이 세워진 것은 1908년이다. 기준점은 양천구의 갈산 정상에 있는 갈산 대삼각본점으로 대한제국 탁지부 양지과에서 세웠다. 삼각본점을 세우려면 당연히 땅에 구멍을 내고 박아야 한다. 내 생각엔 이걸 민족정기 말살하는 쇠말뚝 쯤의 이야기로 만들어 낸 것 아닌가 싶다.

근대 이전의 지도 제작은 산줄기와 물줄기를 그려 넣고 도읍지와 도로를 표시하는 일이었다. 이것의 완성판이 대동여지도라 할 수 있고, 기본적으로 모든 산줄기가 분수령을 이루며 이어져 있는 개념으로 정리되어 있다. 이른바 백두대간이다. 인문지리적 관점에서 백두산을 한반도 모든 산의 출발로 보는 사상은 제법 오래된 것이어서 조선 중기에 이미 백두산 줄기가 흘러 태백산을 지나 지리산에 이르고 지리산에서 다시 잠복하여 한라산으로 이어진다는 개념이 등장하지만, 이를 실제 산세의 구분에 사용한 것은 아무리 빨라도 19세기이고 그것에 각종 정맥의 이름을 붙인 것은 백두대간 붐이 일어난 90년대의 일이다. 백두대간 역시 일종의 만들어진 신화라 할 수 있다. 보다 오래된 지역과 산세의 구분은 영남, 호남, 관동, 관서와 같이 특정 지점을 기준으로 한 것이었다. 이 구분에서는 산줄기 보다 그것을 넘는 관문이 더 중요한 기준점이다.

이러거나 저러거나 "지형"을 다룰 때 백두대간은 나름 괜찮은 방법이고 기존의 산맥 구분에 대해 물이 산을 넘는다느니 하는 비판도 분명 일리가 있는 지적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들처럼 이것도 민족주의와 결합하여 절대화 되기 시작하면 일이 꼬인다. 백두대간이 한반도의 지형을 설명하는 좋은 개념이긴 하지만 절대적이지는 않다는 것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

백두대간과 같이 모든 것이 연결된 산줄기 개념은 일률적인 습곡지형을 설명할 때 유리하다. 태백산맥이 대표적이다. 그러나 제주도와 같은 화산 지형, 한탕강 유역과 같은 침식 지형, 강원도 일대의 돌리네를 비롯한 카르스트 지형 등의 묘사에는 유리하지 않다. 대동여지도의 제주도 부분을 보면 이걸 보고 도대체 뭘 어떻하라는 건지 감조차 오지 않는다. 산은 줄기를 이루어야 한다는 관념이 제주 특유의 오름들을 모두 지워버렸다.

과거의 관념을 이해하는 것과 그것에 동의하는 것은 다른 문제이고, 그것을 다시 현재에 적용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이다. 백두대간의 개념이 한반도의 지형을 설명하는 데 좋은 방법이라고 긍정적으로 이해하면서도, 현재의 지형 파악에는 다양한 방법이 있다는 점도 염두에 두고, 오늘날 한반도의 지리적 이해를 생각해야 한다. 옛날에야 산이 물을 가르고 길은 물따라 났겠지만, 요즘은 고속도로가 산들을 뚫고 달리는 세상인 것이다. 국토의 이용 면을 보아도 지형보다는 지질적 특성이 더 중요하기도 하다. 여기다 원자력 발전소를 지어도 진짜 안전한가 하는 문제를 생각해 보자. 일단 단층은 없어야 하지 않겠나.

쇠말뚝은 뭐, 상대는 생각도 않던 일을 가지고 자신의 관념만으로 세상을 해석하는 사례의 전형이라 할 것이다. 이런 걸 우리는 "음모론"이라고 한다. 그 당시 유행하던 소설 "퇴마록"의 소재라면 모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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