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석

연표

1 # 李孝石論 이용남, 김봉군, 한상무, 『한국현대작가론』, 민지사, 1984.[ | ]

Ⅰ. 硏究史

李孝石에 관해서는 이미 1950년대부터 鄭漢模의 <孝石과 Exoticism>, <孝石文學에 나타난 外國文學의 暻響>등의 논고에 의해 비교적 체계적인 논의가 행해졌으나, 그 본격적인 연구는 60년대부터 이루어지고, 특히 60년대 말부터 70년대에 걸쳐 그에 관한 재평가작업이 활발히 전개되었다. 이 무렵부터 그에 관한 주요논고를 보면, 일반적인 작가론, 작품론으로 鄭明煥의 <僞裝된 順應主義>, 朱鍾演의 <李孝石 作品에 있어서의 몇 개의 모티브에 대하여>, <李孝石小說의 源泉에 대한 소고>, 명계웅의 , 鄭漢淑의 <性의 類型과 그 媒體>, 李商燮의 <愛慾文學으로서의 特質>, 서종택의 <李孝石論의 反省>, 柳基龍의 , 尹明求의 <孝石文學의 變貌樣相>등이 있다.

李孝石에 관한 문예사조론으로는 金敎善의 <外來文學 思潮의 韓國的 受容形態에 關한 老察>, 金允植의 <모더니즘의 精神史的 기반> 등이 있고, 문체 및 기법론으로는 柳基龍의 <孝石小說의 技法에 關한 硏究>, 朴喆熙의 <엑조티시즘의 修辭學>, 蘚斗永의 <李孝石의 文體硏究>, 韓相式의 <소설의 言語·文體·構造>, 趙鎭基의 <李孝石小說의 比喩構造> 등이 있고, 비교문학론으로는 朱鍾演의 <文學 에 있어서의 性의 問題>, 鄭漢模의 <李 孝石과 Anton Chekhov과의 거리> 등이 있으며, 개별 작품론으로는 任重彬의 <李孝石-메밀꽃 필 무렵>, 鄭漢模의 <李孝石의 '분녀'>, 朱鍾演의 <李孝石의 '메밀꽃 필 무렵'>, 柳基龍의 <李孝石의 '메밀꽃 필 무렵'> 등이 있다.

李孝石에 관한 연구는, 그 대상이 '메밀꽃 필 무렵' 등 일부 예술적 가치가 뛰어난 작품에 한정되어 온 경향이 있지만, 작품의 문체나 기법, 그리고 美的 價値의 탐구영역에서 가장 두드러진 성과를 보여 왔으며, 趙演鉉, 鄭漢模, 柳基龍, 丘仁煥 등은 그의 작품의 예술성을 특히 높이 평가하여 왔다.

그러나 70년대에 들어, 작가의식, 특히 사회의식 면에서 李孝石은 많은 논자에 의해 거의 부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鄭明煥이 <僞裝된 順應主義>에서 李孝石의 無主體的 작가정신을 부정적으로 비판한 이래, 金宇鍾, 李商燮, 李在銑 등이 유사한 태도를 보여 왔다. 특히 金允植, 김현은 그들의 「韓國文學史」에서 李孝石을 논의의 대상에서 제외, 극단적인 부정적 평가를 내림으로써, 많은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李孝石의 작가의식의 본질에 대한 보다 정확한 이해와 평가는 그에 관한 연구의 핵심적인 과제로 여겨지며, 李相沃의 <李孝石의 蕃美主義>는 그러한 관점에서, 그에 대한 부정론을 수정해 보려는 진지한 시도로 보인다.

Ⅱ. 略傳 및 作品傾向

李孝石은 1907년 江原道 平昌郡에서 태어났다. 유년시절에 서당에서 한문을 공부한 그는 1919년 平昌 普通學校를 졸업, 1920년 京城 第一高等普通學校에 입학, 성적이 우수하여 1년 선배인 兪鎭牛와 더불어 수재로 불린다. 이 무렵 兪鎭牛와 처음으로 사귀는데, 이 때부터 문학수업을 시작, 체홉, 토마스 만, 맨스필드 등의 작품에 몰입하고, 샤샤키트리의 희곡집도 즐겨 읽는다.

1925년 京城第一高普를 졸업, 京城帝國大學 예과에 입학, 1927년 法文學部 영문과에 진학하며, 1928년 단편 '都市와 幽靈'(朝鮮之光)을 발표, 문단에 등장한다. 이어 1929년에 단편 '奇遇', '行進曲', 1930년에 '깨뜨려지는 紅燈', '弱齡記', '麻雀哲學' 등을 발표하는바, 이들 작품에서 그는 同伴者 작가적 입장에서 도시의 빈민층의 비참과 사회적 모순을 제시, 비판하고 있다.

1930년 京城帝大를 졸업한 李孝石은 결혼(1931년)후, 생활을 위해 1개월쯤 總督府警務局 檢閱係에 근무하나, 개인적 회의와 주위의 질책으로 곧 사직, 妻家가 있는 鏡城으로 내려가 鏡城農業學校 영어교사로 부임한다. 이 때부터 그는 안정을 얻고 취미에 맞는 생활을 즐기며 순수한 문학의 세계에 몰입하게 된다. 그리고 근처에 있는 朱乙 온천의 아름다운 자연과 이곳에 있는 白系 러시아人 별장촌의 異國情緖에 취하기도 한다. 이 무렵에 발표된 단편 '露領近海', '北國通信', '오리온과 능금', '北國點景' 등에는 그의 이 당시의 생활과 취향이 반영되어 있다.

李孝石은 1933년 단편 '豚'(朝鮮文學)을 발표함으로써 초기의 傾向性에서 벗어나 自然歸衣의 자연주의와 심미주의의 문학세계로 전환해 간다. 특히 강조된 것은 '豚'에 드러나 있는 바와 같은 自然的인 性과 愛慾의 예찬이다. 1934년 平壤崇實專門學校 교수로 부임하면서 平壤으로 이주, 계속 그의 자연주의, 심미주의 문학 세계를 확대해 나간다.

1935, 6년경은 그의 문학의 원숙기로, 그의 문학을 대표하는 주요한 작품들이 이 시기에 발표된다. 1935년의 단편 '聖樹賦', '聖畵', 1936년의 단편 '粉女'(中央), '산'(三千里), '들'(新東亞), '메밀꽃 필 무렵'(朝光) 등은 모두 동물적 愛慾 예찬의 자연주의와 심미주의를 반영하고 있는 작품들로 특히 '메밀꽃 필 무렵'은 그 완벽에 가까운 작품적 짜임새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1937년 李孝石은 그의 문학관을 표명한 평론 <現代短篇小說의 相貌>, 단편 '聖餐', '개살구', '落葉記' 등을 발표하며, 1938년에는 단편 '薔薇 병들다'(三千里), '해바라기'(朝光), 장편 '거리의 牧歌'(女性), '幕'(東亞日報) 등을, 1939년에는 단편 '鄕愁', '山精'(文章), '皇帝(文章)', 장편 '花粉' 등을, 1940년에는 단편 '蒼空'(每日申報), 장편 '碧空無限' 등을 1941년에는 단편 '山峽'(春秋), '라오코왼의 後裔'등을 발표한다.

李孝石은 1940년 부인의 사망에 이어 차남의 죽음을 당하고, 그로 인해 심히 괴로워하였다. 마음의 안정을 얻기 위해 滿洲와 中國 등지를 여행하고 돌아왔으나, 신체가 심히 쇠약해져 있었고, 1941년 急病으로 사망하고 말았다.

Ⅲ. 文學的 特性

1. 自然主義

李孝石의 최초의 작가적 면모에는 同伴者 作家的 성격이 뚜렷했다. 그의 '都市와 幽靈'(1929), '行進曲'(1929), '奇遇'(1929), '麻雀哲學'(1930), '깨뜨려지는 紅燈'(1930), '露領近海'(1930) 등 초기의 작품들은 도시의 빈민층과 상류사회와의 격화된 갈등과 대비를 통한 사회적 모순의 고발 또는 노동자, 기생 등 하층민들의 전락과 빈궁의 삶을 그리고 있다. 그러나 30년대로 들어서며 그는 외적 환경의 변화와 자신의 體質的 요구에 따라 종전의 문학적 경향에서 전향, 反社會的인 자연주의적인 작품세계로 침잠한다.

그의 자연주의는 反文明的, 反社會的, 反都會的인, 축어적인 의미의 자연주의로서, 인간은 자연의 일부이며 문명이나 사회를 떠나 자연으로 돌아감으로써 행복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점에서 루소의 자연주의사상과 공통점이 있다.

그의 자연주의는 '오리온과 능금'(1932), '北國點景'(1932), '十月에 피는 林檎꽃'(1933), '豚'(1933) 등 30 년대 초 작품에서도 부분적으로 드러나고 있지만, 작가로서 그의 원숙기인 30 년대 중반 무렵에 쓰여진 '산'(1936), '들'(1936), '메밀꽃 필 무렵'(1936), '山精'(1939) 등의 작품에서 전면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며,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그 현저한 예술적 성과를 보여 주고 있다.

'산'은 산에 들어오기 전엔 마을에서 머슴살이를 하던 중실이란 주인공이 주인의 근거없는 투기로 살던 집에서 쫓겨나 산에 들어와 살게 되는 이야기를 다루고 있다. 그러나 작품에서 작가의 강조점은 이러한 스토리의 내용보다 산에 들어와 살게 된 주인공의 자연에 대한 심미적 태도와 自然合一의 궁극적 경지의 표현에 두어져 있다.

낙엽 속에 파묻혀 앉아 깨금을 알뜰히 바수는 중실은 이제 새삼스럽게 그 향기를 생각하고 나무를 살피고 하늘을 바라보는 것이 아니었다. 그런 것은 한데 합쳐서 몸에 합빡 젖어 들어 전신을 가지고 모르는 결에 그것을 느낄 뿐이다. 산과 몸이 빈틈없이 한데 얼린 것이다.

눈에는 어느 결엔지 푸른 하늘이 물들었고 피부에는 산냄새가 배었다. 바심할 때의 짚북더기보다도 부드러운 나뭇잎-…-속에 목을 파묻고 있으면 몸뚱어리가 마치 땅에서 솟아난 한 포기의 나무와도 같은 느낌이다. 소나무, 참나무, 총중의 한 대의 나무다. 두 발은 뿌리요 두 팔은 가지다. …몸은 한 포기의 나무다.

李孝石의 자연주의는, '들'에서는 험악한 현실세계를 떠나 자연 속에서 野性的으로 살아가는 주인공의 삶과 자연예찬의 태도를 통해, '山精'에서는 문명을 벗어난 자연 속에서의 야생적 행동과 자연적 정기에 대한 찬미를 통해 되풀이되어 나타나고 있지만, 이들 작품에 나타나 있는 자연은 인간이 돌아 가 의지해야 할 삶과 존재의 영원한 근거라기보다 현실도피의 일시적 위안이나 마취의 효과를 주는 대상이라는 점에서 스스로 한계를 지닌다. 즉 李孝石의 자연주의에는 그가 벗어나려는, 사회와 문명 속에 인간적 삶의 조건에 대한 근본적인 윤리적 통찰이 결여되어 있고, 다만 사회와 문명의 喧擾에서 벗어나 자연에서 일시적 위안을 구하려는 태도가 두드러지게 드러나 있을 뿐이다.

李孝石은 이러한 그의 자연주의의 허점을 세련된 美意識에 의해 塗布하려 하며, '메밀꽃 필 무렵'에서 그 현저한 성과를 보여 준다. 이 작품은 그의 소박한 자연주의가, 지성이 빚은 세련된 미의식과 융합, 감동적인 진실의 차원에까지 끌어올려진 예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山'이나 '들'과 같은 작품에 비해 볼 때 뚜렷한 스토리의 요소를 지니고 있다. 즉 그것은 주인공인 허생원의 젊은 시절의 우연한 情事, 사생아의 출산, 여인의 가출과 결혼, 동이의 가출, 부자의 해후 등 일련의 극적 사건을 포함하고 있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사건들은 작품의 표면에 강조, 제시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플롯 내에서 작중인물들의 대화에 의하여 간략하게 도입되거나 함축되어 있을 뿐이다. 따라서 이 소설의 플롯은 주인공인 허생원이 봉평장을 떠나 대화로 가는 도중 동업자의 하나인 동이가 자기의 자식이라는 사실을 발견하게 되는 일련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 소설의 플롯에는 사실 이렇다 할 葛藤이 없을 뿐 아니라, 사건의 전환을 이루는 클라이맥스나 데이누우망도 찾아볼 수 없다. 작자의 강조점은 오히려 과거에의 추억 속에서 오로지 삶의 보람을 찾는 초라한 보헤미안 허생원, 그리고 그와 뚜렷한 대조를 이루면서도 전체적으로 그를 일부로 융해하고 있는 아름다운 자연 배경과 분위기의 제시에 두어져 있다.

허생원은 자연 속에서 태어나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는 인물이다. 자연의 일부로서의 그의 존재는 달빛·메밀꽃·개울로 이루어진 山水畵的 자연 배경 속에서,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옛 추억을 되새기며 밤길을 걷는 정경묘사의 부분에서 암시적으로 잘 드러나 있다. 이 부분의 묘사는 분명 인간을 자연의 일부로 융합시켜, 현란한 채색과 精巧한 구도로 그린, 한 폭의 東洋的 山水畵를 연상시킨다. 작가의 자연관은 또한 다음과 같은 부분에서는 비교적 명시적으로 진술되어 있다.

드팀전 장돌림을 시작한지 이십 년이나 되어도 허생원은 봉평장을 빼논 적은 드물었다. 충주, 제천 등의 이웃 군에도 가고 멀리 영남지방도 헤메이기는 하였으나 강릉 쯤에 물건하러 가는 외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군 내를 돌아 다녔다. ……장에서 장으로 가는 길의 아름다운 강산이 그대로 그에게는 그리운 고향이었다. 반날 동안이나 뚜벅뚜벅 걷고 장터 있는 마을에 거지반 가까웠을 때 지친 나귀가 한바탕 우렁차게 울면―더구나 그것이 저녁녘이어서 등불들이 어둠 속에 깜박거릴 무렵이면 늘 당하는 것이건만 허생원은 변치않고 가슴이 뛰놀았다.

위의 예문, 특히 밑줄 친 문장의 내용은 허생원의 삶의 터전은 바로 아름다운 자연이며, 그곳이 또한 그의 영원한 憧憬의 대상이요, 그의 삶의 궁극적 歸依處임을 시사해 주고 있다. 이러한 自然歸依, 自然歸一사상은 작품에서 주인공과 그의 평생의 동반자인 나귀와의 類推, 작품 결미부분에서 혈연에 이끌리는 주인공의 본능의 암시를 통해서도 드러나고 있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 李孝石의 자연주의는 그 서정적 美學과의 결합에 의해 감동적인 삶의 진실의 일면을 계시하고 있지만, 동양의 전통적인 현실도피적 은둔주의와 脈이 닿아 있는 그의 사상은, 그 시대 현실과 사회윤리적 문맥과의 絶緣으로 인해 스스로 그 폭이 한정적인 것이 되고 말았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그 反社會的, 反文明的 태도에서 유사한 루소의 자연론과 대비된다. 루소의 경우, 그의 자연론의 反社會的, 反文明的 외양에도 불구하고 본질적으로 사회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사회 개조의 원리로서 제안된 것인데 반하여, 李孝石의 경우는 자연이 개인적인 현실도피의 수단이나 은둔의 歸依處로 추구되어 있을 뿐이다. 그에게 있어 자연은 인간의 삶을 변화 혹은 개조할 수 있는 궁극적 원리나 가치가 아니라, 심미적 감각과 감정이 지향하는 대상임에 머물러 있다. 그리고 그의 자연주의의 이러한 허점은, 자연주의를 토대로 한 그의 많은 작품세계의 구조적 한계와 약점의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어 있다.

2. 에로티시즘

李孝石 문학에 있어 가장 핵심적인 모티브는 愛慾의 예찬이다. 그리고 이는 그 바탕에 있어 自然主義와 관련되어 있다. 사실 '들', '山精', '메밀꽃 필 무렵'등 그의 자연주의적 작품에는 자연예찬 혹은 自然歸依의 태도와 함께 원시적 애욕의 충동과 행위가 그려져 있다.

李孝石은 인간의 애욕을 동물의 생식욕과 같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을 뿐 아니라, 나아가 동물적인 애욕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예찬하고 있다. 그의 이러한 性觀이 가장 잘 드러나 있는 작품이 '豚'이다. '豚'에서 씨받이를 위해 돼지를 끌고 種苗場에 간 주인공 식이는 種苗場에서 암퇘지를 엄습하는 수퇘지를 보며, 자기가 짝사랑하던 분이를 연상한다.

털몸을 근실근실 부딛히며 그의 곁을 궁싯궁싯 굼도는 씨?은 미처 식이의 손이 떨어지기도 전에 '화차'와도 같이 말뚝 위를 엄습한다. 시뻘건 입이 욕심에 목메어서 풀무같이 요란히 울린다. 깔리운 암?은 목이 찢어져라 날카롭게 고함친다.

종묘장의 돼지의 교미행위는 '粉女'(1936), '獨白'등의 작품에도 되풀이대서 제시되어 있지만 李孝石의 문학에서 돼지는 활력적인 生의 에너지를 상징하는 대표적인 동물이다. 돼지 이외에 그의 작품에는 개, 당나귀. 말 등 길짐승은 물론, 닭, 독수리 등 날 짐승도, 찰거머리 같은 환형동물도 무수히 나온다.

'메밀꽃 필 무렵'에서는 주인공 허생원의 애욕을 당나귀의 發精에 유추시켜 암시하고 있으며, '들'에서는 주인공과 옥분이와의 우연한 성관계를 개들의 교미행위를 계기로 해서 그리고 있다. '粉女'의 경우에는 동물의 등장은 없지만 주인공 분녀가 여러 남성들에게 차례로 능욕을 당하는 동안, 오히려 남성들을 그리워하고 性에 눈뜨게 된다는 이야기로, 인간의 애욕을 동물의 차원에서 그리고 있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으로 표현하고 있다.

애욕의 본능을 나타내고 있는 李孝石의 많은 작품에는 동물과 함께 식물, 특히 꽃이 애욕의 象徵으로 자주 등장하고 있다. 꽃은 여인을 암시할 뿐 아니라, 여인의 性器, 그리고 여인의 성적 욕망을 암시하기도 한다.

도장같이 가슴 속에 찍힌 새빨간 풍경이 생생한 꽃같이 살아서 바닷바람에도 쉽게 식지 않았다.

나의 몸은 아직도 덥다. ……나의 마음의 붉은 꽃은 아직까지도 조개같이 방긋이 열린 채 익은 능금송이 같은 새빨간 별이 열린 조개 틈으로 엿보고 있다.

(獨白)

'獨白'은 스토리는 없이 전체가 여인의 애욕의 불길을 표현하는 데에 바쳐지고 있는 작품으로, 위의 예문에는 여인의 욕망이, 열린 조개, 붉은 능금, 붉은 꽃이 암시하는 여인의 그곳에 집중되어 있는 예민한 촉감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리고 이와 같은 꽃이나 식물의 상징은 '石榴'(1936), '落葉記'(1937), '장미 病들다'(1938), '鄕愁'(1939), '花粉'(1939) 등 소설은 물론, '花草'(1940), '綠陰의 香氣'(1941), '化春意匠' 등의 수필에서도 무수히 되풀이하여 제시되고 있다.

동물적인 活力의 애욕과 욕망의 피부적 감각을 강조하는 李孝石의 에로티시즘은 자연적인 배경이 아닌, 도시와 문명을 배경으로 하고 있는 '聖畵'(1935), '거리의 牧歌'(1938), '花粉'(1939), '碧空無限'(1940) 등 중·장편 작품에서도 유사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다.

'花粉'은 도시 교외의, 수풀과 화초에 싸인 아름다운 산장 '푸른집'을 중심으로 家長인 현마와, 그의 비서인 미소년 단주, 현마의 첩 세란, 처제인 미란 등이 벌이는 복잡한 애욕관계와 갈등을 그린 작품이다. 이 작품에서 현마와 세란, 단주 등은 모두 인간사회와 문명의 전통적인 性倫理에 구애받지 않는 인물들이다. 그들의 애욕관계는 동물적이고 충동적인 性慾을 충족시키려는 동기에 두어져 있으며, 따라서 그 상대의 선택이나 數에 있어서 자유롭다. 그들의 이러한 태도는, 가령 미란과 옥녀를 함께 좋아하는 단주의 다음과 같은 발언에서 잘 드러나고 있다.

두 사람을 왜 못 좋아해. 넌 꽃밭의 꽃을 꼭 한 가지만 좋아하니. …꽃이란 다 좋은 게란다. 널 꽃이라는 건 아니나, 미란이를 좋아하면서 너까지 좋아하는 게 거짓말이란 법이 어디 있다더냐.

이리하여 현마는 세란, 미란, 단주와 단주는 세란, 미란, 옥녀와 愛慾關係를 가지며, 사회적인 禁忌인 처제(현마-미란)와의 관계는 물론 同性愛의 관계까지도 제시되어 있다.

현마와 단주, 세란과 같은 亂交型의 인물은 '聖畵'에서는 두 남자와의 이중생활을 즐기는 여주인공 난야, '거리의 牧歌'에서는 일시적인 색욕의 충족을 위해 여인에 대한 악마적 행동도 서슴치 않는 윤주, '碧空無限'에서는 이룰 수 없는 사랑 대신 상대의 육체를 탐하는 단영, 명도와 같은 여러 인물들로 나타나고 있다. 이들 작품에는 물론 '花粉'에서의 미란과 영훈과의 관계와 같은 순수한 애정관계가 제시되어 있기도 하지만, 상술한 亂交型의 인물들에 비할 때, 그 인상의 강도는 매우 미약하다.

본능적인 愛慾을 예찬·미화하는 李孝石의 에로티시즘은 자주 D.H. 로렌스(Lawrence)의 그것과 비교되어 왔다. 사실 그에 관한 일부 전기적 사실은 그가 로렌스에게서 큰 영향을 받았음을 시사해 주고 있다.

그런데 로렌스의 경우, 그의 性에 대한 강조는 뚜렷한 文明觀과 人間觀을 바탕으로 한 것이었다. 그는 현대문명을 부정하고 있는 바, 그것은 현대 문명이 인간에게 기계적이고 知的인 생활을 강요함으로써 인간의 생명적인 의식 (the unconsiousness)을 죽여버리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러한 生命的인 無意識의 세계에의 도달은 남녀간의 육체의 교감 즉 性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리하여 생활의 근저에 무엇보다도 性의 충족이 있어야 하며, 이성의 충족을 통해서만 위대한 목적을 가진 창조적 활동에의 협력이 가능하다고 하였다. 로렌스의 위대성은 다만 위선에 가득찬 英國 사회에서 대담한 성묘사를 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 아니라, 性에서 가장 강렬하고 건전한 생명의 발현을 보고, 그것을 다른 모든 가치보다 귀중한 것으로 선택했다는 점에 있는 것이다.

로렌스에게는 이와 같이 그의 문학에 일관하는 뚜렷한 가치관과 도덕의식이 있었다. 그러나 李孝石에게서는 이러한 면모를 찾아볼 수 없다. 그의 문학에서 성적 행위의 도중에 혹은 그 끝에 이르러 인생의 기쁨을, 變身의 체험을 느끼는 인물을 발견하기는 불가능하다. 다만 성적 본능에 이끌려 가는 것이 인간이며, 이 점에서 인간은 동물과 다름없다는 것, 그리고 그것은 不道德하기는커녕 순수하고 아름다운 것이기조차 하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을 뿐이다.

李孝石 문학의 에로티시즘은 그의 자연주의와 마찬가지로 사회 현실로부터의 도피를 그 근본동기로 하고 있다. "그의 性의 세계는 하나의 가치로서의 적극적 중요성을 띠고 있는 것이 아니라, 사회적 자아로 하여금 잠시 상황을 잊게 할 수 있는 市井의 나이트클럽과 같은 것이다."

이것이 그의 에로티시즘의 한계이며, 이러한 특징은 그 사상적 바탕이 되는 자연주의에 대한 形而上學的 사색이나 사회윤리적 성찰이 결여되어 있는데 그 근본 원인이 있다 하겠다.

3. 抒情的 美學의 言語

李孝石의 가장 탁월한 문학적 성취는 그 언어와 문체에 있다. '眞實을 추구해서 그 위에 높은 詩의 境地를 創造해 가는 곳에 작가의 第二段의 자각이 서야 할 것'이라는 그의 문학의식이 바로 그의 언어미학의 출발을 이루며, 그의 많은 작품은 그의 이러한 의식을 반영하려는 뚜렷한 노력을 보여 주고 있다.

李孝石의 문체는 '前代의 작가들이 이룩한 文體美學 내지 小說美學을 거부하는 독자적인 이탈'을 보여주는 개성적인 문체로, 30년대의 가장 수준 높은 문학체이다. 그 구체적인 성과는 신문학 이후 소설에서 주로 형식적인 이론에 이끌려 진부할 정도로 답보하고 있던 우리의 산문에 詩的 情緖의 표현을 도입, 그것을 서정적 미학의 수준에까지 끌어 올렸다는 점이다. '메밀꽃 필 무렵'은 이 점에서 가장 뛰어난 그의 대표작이다.

李孝石 문체의 특징으로 먼저 들 수 있는 것은 主語 없는 문장의 사용이다. 鄭漢模는 구체적인 작품의 대비를 통해, 李孝石이 金東仁보다 '主格 內顯'의 문장을 6배나 더 많이 쓰고 있음을 통계로 밝히고, 그 효과를 '문장에서 받는 인상이 부드러울 뿐 아니라, 단락이 뚜렷이 떨어질 때까지는 終止符에 관계없이 같은 정서와 분위기 속에서 같은 호흡으로 읽어나갈 수 있다'고 설명하고 있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이러한 특징은 대상에다 '나'를 융해시키려는 시정신에 기인하는 것이다.

李孝石의 작품에는 또한 참신하고 세련된 비유가 빈번하게 제시되어, 작품의 시적 분위기 조성에 기능적 구실을 하고 있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밤중을 지난 무렵인지 죽은 듯이 고요한 속에서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가 손에 잡힐 듯이 들리며 콩포기와 옥수수 잎새가 한층 달에 푸르게 젖었다. 산허리는 온통 메밀밭이어서 피기 시작한 꽃이 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메밀꽃 필 무렵)

위의 예문에서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짐승같은 달의 숨소리' '소금을 뿌린 듯이 흐믓한 달빛' 등의 참신한 比喩語에 의하여 장면의 화폭은 다만 생생하고 선명할 뿐 아니라, 섬세하고 미묘한 色調까지 띠게 된다. 그러나 이들 비유어는 사실 土俗的인 感性에서 비롯된 것이라기보다는 다분히 西歐的 지성으로 세련된 감성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겠다. 장면 속의 인물과는 상당히 거리가 있는, 土俗的 또는 일상적인 언어와 거리가 있는 말이다. '길은 지금 산허리에 걸려 있다.' 같은 표현은 당시의 우리말과는 인연이 먼, 英語의 번역체에 가까운 표현이다. 그리고 이러한 일련의 비유어들은 일상적인 언어만으로는 미흡한, 자연의 아름다움에 대한 작자의 주관적인 정서의 着色을 가능하게 해 줄 뿐 아니라, 자연에 대한 심미적인 태도마저도 은밀하게 암시해 주고 있다.

李孝石의 문체에는 또한 개인어의 사용이 현저한 특징으로 나타나고 있다. 일상어에서 흔히 쓰지 않는 한국 고유어의 관용어법이나 의성어, 의태어의 빈번한 사용은 작품에 묘미를 느끼게 하고 詩的 분위기를 이루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다.

2 # 김용성, 한국현대문학사탐방, 출현암신서, 1996.[ | ]

1. 봉평의 실화

초기에 동반자적 작가라고 지칭받던 가산(可山) 이효석은 누구보다도 빨리 가면을 벗고 그 자신의 모습, 시적 정신으로 충만한 세계에 돌아가 주옥의 단편을 써내기 시작했다. "심미감과 쾌(快)의 감동을 떠나서 소설은 없다."라고 1940년에 주장할 수 있을 만큼 그의 소설은 심미감과 향수로부터 비롯되어 인간의 마음에

은은한 향기를 뿌려주기도 하고, 때로는 잔잔한 감동을 주기도 한다.

효석은 고향을 떠나, 북방에서 이방인처럼 고향을 그리며 고향의 산과 들을 시적 소설로 엮어나갔다. 그리하여 나이 29세에 우리나라 단편문학의 대표작의 하나로 꼽히는「메밀꽃 필 무렵」을 써내니 효석 문학의 진정한 가치는 여기에서 꽃피었다.

강릉으로 넘는 진부를 50여 리 앞두고 장평이란 곳에서 가던 길을 버리고 서쪽으로 큰 내를 건너서 노루목 고개를 넘어 20여 리, 효석의 생가가 있는 곳이자「메밀 꽃 필 무렵」의 작품 무대인 봉평이란 곳에 이르게 된다. 메밀꽃이 만발하면 눈

내린 벌판 같다던 이곳도, 수익성 작물에 밀려나 메밀꽃은 제 철을 맞아도 드문드문 하다는데 때마침 산천을 덮은 하얀 눈발이 달빛에 교교하니 효석이 본 그의 고향의 메밀꽃밭이 한창일 때 이럴까 싶다.

그의 생가는 봉평면 면소재지인 창동에서도 개울을 건너 5리 가량 떨어진 두메산골 속 남안동에 있다. 그 골짜기 둔덕 위의 마을을 올려다보면 외따로 떨어진 양지 바른 곳에 양철지붕의 집이 있다. 재작년까지만 해도 원래 초가지붕이던 것을 40년 살아오던 집주인 홍재철(洪在鐵·농사)이 지붕을 거두고 기둥을 갈아 끼워 다시 세웠다.

남안동 토박이 노인들은 효석의 부친 시후(始厚)라면 모두 알고 있었다. 이곳의 추정엽(秋鼎燁)노인은 "효석은 꼭 한 번 서울서 다니러 온 것을 보았지만 시후 어른은 후에 면장을 지내기 위해 장거리로 나갈 때까지 내내 잘 알았다."한다. 효석의 집안은 이곳에서 대대로 살아온 것은 아니다. 함경도 사람이라느니, 평안도 사람이라느니 구구하지만 차녀 유미에 의하면 "증조부 때 홍성에서 봉평으로 옮긴 집안"이라는 것이다.

후에 효석의 부친 시후는 진부 면장으로 전근하여 10년 면장을 지냈고, 모친 강씨가 진부 성결교회의 공로자로 알려지고 있는데, 진부 사람은 효석의 생가가 진부라 우기고, 봉평 사람은 봉평이라 우기는 까닭도 그런데 있을 것이다.

효석이 태어난 것은 1907년 2월 23일, 그 무렵에 한성사범 출신의 부친이 서울에서 교편을 잡고 있어 4세 때에는 모친과 함께 서울로 갔다가 5세 때 고향에 내려와 서당에서 한문을 배우니 어려서부터 재능이 있어 신동으로 불렸다. 그러나 부친은 "천재는 요절한다."는 뜻에서 남들이 그렇게 부르는 것을 달갑지 않게 여겼다.

나이 6세에 평창에 나가 보통학교를 다니고 그곳을 거쳐 경성제일고보에 입학한 것이 13세 나던 1920년의 일이다. 그는 그 후 경성제대(京城帝大) 법문학부 영문과로 진학, 졸업하고 나서도 내내 고향에는 잠깐 들른 정도, 서울, 경성(鏡城), 평양 등지를 전전하며 살았다.

효석이 글을 발표하기는 경성제대 예과 시절이다. 조선인 학생회에서 발간하는 기관지『문우(文友)』와 예과 학생회지『청량(淸?)』을 통해서였다.

그가 문단에 첫선을 보인 것은 당시『조선문단』과는 대조적인 입장에 섰던『조선지광(朝鮮之光)』에 낸 단편「도시와 유령」이었다. 그 이듬해 계속해서「기우(奇遇)」,「행진곡(行進曲)」등을 발표했으며 당시 학생이던 그는 맨스필드에 열을 내기도 했다.

그러나 그가 익명으로 발표하기는 경성제일고보 4, 5학년 무렵 매일신보에 원고료 타는 재미로 냈던 수십 편의 콩트가 있었다.

그는 사실상 기성문인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소설가로 인정받은 후에도 이 버릇을 버리지 못하여 그의 고백(수필·첫고료)대로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두 번 선자를 괴롭혀 20원과 50원을 우려낸 일"이 있었고, 이런 고료는 대부분 술값으로 대용되었는데, 한 번은 이 돈으로 학교 1년 선배요 문단 동배인 현민(玄民) 유진오에게 수송정 하숙집에서 톡톡히 차린 적도 있었다 한다.

1930년 여름에 조선일보에서는 가장 인기있는 '5대작가(五大作家)' 단편 게재 예고를 내면서 연재하였는데, 효석이 여기에 낀 것을 보더라도 그의 인기는 문단 데뷔 1, 2년 만에 화려하게 부상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의복도 대단히 스마트하게 차리고, 칠피 단화에다 여자 구두 모양으로 나비 형상의 장식을 붙인 구두를 신고는 했으며, 주량도 두주급(斗酒級)이었다.

하지만 화려한 시대가 가버리고 갑자기 실의의 시대가 그 앞을 가로막았다. "원인은 경무국 검열계에 취직한 것 때문이었다. 그를 아는 사람들은 그가 배반했다 하여 맹렬하게 지탄을 하였다. 사실 그 직장은 학교를 졸업하고 1,2년 직장이 없이 지내던 터라, 중학때 옛 스승에게 취직자리를 부탁한 끝에 얻은 것이었다. 그는 고민하던 끝에 1개월만에 직장을 버리고 경성 처가가 있는 곳으로 갔다."

이렇게 옛일을 돌이켜 보는 친구 현민의 모습에도 이제는 백발이 내렸다.

이석씨(李石氏)가 졸도를 했다고 사람이 와서 그의 잠자는 수송동(壽松洞) 집 방(房)에 가 본 일이 있다. 광화문(光化門) 통으로 내려오려니까 R이라는 청년(靑年)이 이석씨(李石氏)더러 "너두 개가 다 됐구나" 하더라는 것이다. 그때 이석씨(李石氏)가 총독부 경무국 검열계(總督府 警務局 檢閱係)에 취직을 해서 한 열흘을 다녔을까말까 하던 때의 일이다. 총독부(總督府)에서 광화문(光化門) 등으로 내려오는데 R이라는 청년(靑年)이 지극히 험한 얼굴을 하면서 이석씨(李石氏)에게 그와 같은 욕설을 퍼부었으니 심약(心弱)한 이효석씨(李孝石氏)로서 졸도를 하지 않고 배길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이효석씨(李孝石氏)는 검열계(檢閱係)에 취직을 하고 나서 무척 괴로워했으니까. 그의 한 동안의 생활(生活)은 말이 아니었다. 끼니를 이어갈 수 없으리 만큼 궁색했다.

경무국 검열계에 나간 것이 1개월이든 10일이든 세상사람들에겐 불쾌한 일임에는 틀림없었을 것이다. 시대를 대표하는 지성인으로서 아무리 생활이 궁색했다 하더라도 스스로 그만둘 일을 스스로 택했었다는 것은 스스로에게도 뼈아픈 일이었다.

2. 시적 서정의 세계

이후 그는 처가가 있는 경성으로 갔다. 거기서 농업학교 교원으로 있으면서 효석은 실의에 잠겨 있었으나 그는 세상 잡사와는 인연을 끊고 자기만의 세계를 창조하기에 열중하였다. 과거의「도시와 유령」등의 동반가적 태도라는 것도 그에게는 한갓 흘러간 풍조에 지나지 않았다.

「돈(豚)」등 일련의 향토를 무대로 한 작품이 나오기 시작한 것도 이 무렵이었다. 그는 1934년 평양숭실전문학교 교수로 옮겨가면서 본격적으로 작품을 쓰기 시작했다.

1936년에는「분녀(粉女)」에서 그의 특이한 성적 모랄을 제시하고,「산」,「들」에서 향수적 서정소설을 내더니, 그해 마침내 그의 걸작「메밀꽃 필 무렵」이 탄생한 것이다.

여름장이란 애시당초에 글러서 해는 아직 중천에 있건만 장판은 벌서 쓸쓸하고 고운 햇발이 벌려 놓은 전 휘장 밑으로 등줄기를 훅훅 볶는다. ……얼금뱅이요 왼손잡이인 드팀전의 허생원은 기어이 동업의 조선달을 낚구어 보았다.

봉평의 파장으로 시작되는 허생원의 기묘한 이야기는 설마 그러랴 싶지만 짜임새가 완벽하여 무리가 없다. 게다가 실화였다는데, 학생시절부터 '허생원의 이야기'를 작품화하려고 구상해왔을지도 모르니 거기에 이 작품의 서정적인 동인이 있다 할 수 있다.

파장을 한 뒤 허생원은 조선달을 따라 그다지 마음이 당기지 않으면서 충주집으로 막걸리잔이나 기울이려고 따라간다.

허생원은 계집과는 연분이 멀었다. 얼금뱅이 상판을 쳐들고 대어설 줏기도 없었으나 계집편에서 정을 보낸 적도 없었고 쓸쓸하고 뒤틀린 반생이었다. 충줏집을 생각만 하여도 철없이 얼굴이 붉어지고 발밑이 떨리고 그 자리에 소스라쳐 버린다.

허생원은 그날 충주집에서 동업의 젊은 장돌뱅이 동이를 만나는데, 젊음에 대한 시기심인지 동이에게 공연히 부아를 부려보는 것이다.

여자를 모르는 허생원이건만 이십여 년 전 바로 이 봉평에서 성서방네 처녀와 물레방앗간에서 정을 맺은 적이 있었다. 다음날 이 대화장을 보려고 허생원, 조선달, 동이 등 세 사람은 충주집을 나와 당나귀를 몰아 길을 떠나는데, 달은 휘영청 밝고 메밀밭은 소금을 뿌린 듯 한데 꼭 그런 날이면 단 한 번의 정분을 맺던 기억이 떠올라 수없이 들려준 이야기건만 또 다시 조선달에게 이야기하는 것이다.

봉평은 지금이나 그제나 마찬가지나 보이는 곳마다 메밀밭이어서 개울가가 어디 없이 하얀 꽃이야. 돌밭에 벗어도 좋을 것을 달이 너

무도 밝은 까닭에 옷을 벗으러 물방앗간으로 들어가지 않았나.

작품은 동이가 아버지를 모르는 젊은이로, 고향이 봉평이라는 동이의 고백을 들으면서 고조되다가, 개울을 건널 때 같은 왼손잡이인 것을 "오래 동안 아욱신이 같이 눈이 어둡던 허생원도 요번만은" 놓치지 않고 잡아낸 것이라는 클라이막스와 함께 끝이 난다.

효석보다는 두 살 아래인 황일부(黃一富) 노인은 효석보다는 늦게 필통을 옆에 차고 서당을 다닌 사람으로 당시 점심 밥그릇을 장터 끝 '충줏집'에 맡기고 다녔다는데 효석이 평창에 나가 있는 동안이라도 종종 봉평으로 왔으므로 '충줏집'과 '허생원'에 얽힌 이야기를 알고 있었을 것이라는 말이다.

황노인이 20여 세까지도 봉평 장터에 나타나던 '허생원'은 약간 얼금뱅이긴 하나 남자답게 생겼다. 흠이 왼손잡이었지만 "아무래도 당시 40여 세 난 충줏집과는 객주집 신세를 지면서 정이 통한 것 같은 사이"로 보였다. 그러던 것이 우연히 봉평 개울 건너 남안동 성씨네 옥분이라는 딸과 물레방앗간에서 만나 인연을 맺었다. 이 사실이 어찌된 셈인지 인자하기만 하던 '충줏집' 입에서 터져 나오자 성서방네 처녀는 제천인가 어디로 갔다 하고, 다음 장날에는 부랴부랴 성씨네 일가도 마을을 떠나 종적을 감췄다는 것이다.

그리고 '충주집'도 10년 뒤 어디론가 떠나버렸다. '조선달'이라면 봉평 토박이 조원중(趙元重)을 두고 하는 말인데, 본디 '충줏집'에서 살다시피 했으나 장돌림은 아니었다. 봉평의 어린아이들은 조원중 노인이 '허생원'과 잘 어울리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그러나 '동이'를 기억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지금의 경찰서에서부터 줄줄이 늘어서던 장터도 이제는 더 안쪽으로 깊숙히 옮겨져 있다. 요즘의 객주집 색시들은 "장돌뱅이만큼 인색한 사람도 없다"고 푸념이니, 그런 서정적 전설같은 이야기도 봉평 장터에서는 사라지고 있다. 그러면 효석의 작품세계는 어떤 것일까.

실제(實際)로 씨(氏)는 소설(小說)의 형식(形式)을 가지고 시(詩)를 읊은 작가(作家)라고 나는 생각한다.

한동안 문단(文壇)에서는 산문정신(散文精神)이라는 것이 시끄럽게 논의(論議)되고 있어 산문정신(散文精神)이야말로 문학(文學)의 정신이 아닐 수 없다고 주장(主張)되었지만 그런 논의(論議)에 씨(氏)는 귀도 기울여 보이지 않았다.

씨(氏)에겐 수많은 아름다운 수필(隨筆)이 있지만 그것은 정(正)히 수필(隨筆)의 옷을 입은 시(詩) 그것인 것이다.

이처럼 유진오는 효석 문학의 시정신을 강조하고, 「노령근해(露領近海)」등 초기 작품들은 냉정히 분석하면 좌익적 이데올로기는 볼 수 없고, '운동'이니 '투사'니 하는 작품 속의 용어도 시를 위해서 있는 단순한 도구라고 주장한다. 또한 이원조(李源朝)는 1939년 작품집『해바라기』를 평하는 자리에서 작가적 세계가 통일되지 않은 인상을 받는데, 그것은 '운동', '회관', '칠년간' 등의 요약어를 남용하고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런 용어가 작품의 주제를 나타내는 데에 아무런 보탬도 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어쨌든 이러한 용어를 효석이 의식적으로 썼던 것만은 틀림없는데, 산문 문장으로서의 강인한 성격을 부여하지 못한 것만은 사실이다.

이효석(李孝石)의 작품(作品) 속에 나오는 인물(人物)들「산(山)」의 '중실'과「메밀꽃 필 무렵」의 '허생원'은 애정(愛情)의 표현(表現)이 시적(詩的)인 것으로 승화(昇華)되기는 했지만, 사회(社會) 안에서 살아가고 있는 다른 사람들의 공적(公的)인 문제(問題)와 아무런 관계를 가지고 있지 않다.

그의 농촌 제재의 작품들을 김유정의 작품과 관련시켜 사회적 관계로 이해하려는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그러니까「메밀꽃 필 무렵」에서도 효석은 장돌뱅이의 소박하고, 어쩌면 운명적인 한 아름다운 시를 소설화하기는 했으나 사회적 문제라는 점에서 볼 때 거리가 멀다 할 것이다.

3. 서구에의 동경

꽃 중에서도 특별히 양이(洋梨)의 향기가 난다는 장미를 좋아했고, 모차르트의「피아노 소나타」의 음률을 월부지만 구입한 야마하 피아노에 실었으며, 쾌히 쇼팽을 치곤 하는 것이 숭실전문 교수 시절에 즐기던 여가였다. 차녀 유미는 그 때 식탁에는 "버터나 통조림이 된장국보다 자주 올랐고, 삶은 옥수수는 우유맛에 비교하고 풋사과를 삶아서 예쁜 그릇에 담아 먹는 것이었다"고 회상한다.

「주을(朱乙)의 지협(地峽)」이니「주을 가는 길에」니 하는 수필에도 자주 표현되고 있지만, 효석은 유달리 주을의 온천을 좋아하였다. 또 이곳은 작품의 무대(「화불」)로도 나타나는데 이것은 주을에 와 있던 백제 러시아인 별장촌의 이국 정서에 대한 동경의 발로라 해도 그릇된 말은 아닐 것이다.

이와 같은 견지에서 정한모(鄭漢模)는 그의 작품 세계를 다음과 같이 요약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는 육신(肉身)의 낙지(落地)이며 어린 꿈의 요람지(搖籃地)인 고향에 대한 혈연적 향수(血緣的 鄕愁)이며 또 하나는 현대문학(現代文學)의 발생지인 구라파(歐羅巴) 내지 구라파적(歐羅巴的)인 것에 대한 현대문학권내(現代文學圈內)에 살고있는 사람으로서의 향수(鄕愁)이고 또 다른 하나는 현대문명(現代文明) 속에 일그러져 가고있는 인간(人間)들이 그 시달림 속에서 일그러지지 않았던 상태(狀態)의 인간상(人間像)을 찾고자 하는 향수(鄕愁)-에덴적(的)인 것에 대한 향수(鄕愁)이다.

그는 그런 점에서 프랑스적이며 모더니즘적이었다. 그래서 그의 문학을 버텨내는 문학이라 공격하는 사람들에게 그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는 것이다.

메주내 나는 문학이니 버터내 나는 문학이니 하고 시비(是非)함같이 주제넘고 무례한 것이 없다. 메주를 먹는 풍토에 살고 있으므로 메주네 나는 문학을 낳음이 당연하듯 한편 서구적 공감(西歐的 共感) 속에 호흡하고 있는 현대인의 취향(趣向)으로서 버터내 나는 문학이 우러남도 이 또한 당연한 것이 아닌가.

그는 맨스필드, 체홉, 입센, 토마스만, 장 콕도 등을 섭렵하면서 그의 문학을 완성하려 한 듯 하다. 그리고「화분(花粉)」에서 짙게 표현되고 있는 또 하나의 특질, 자연적인 상태의 성적 개방은 인간성에의 회귀를 의미하는데, 그 성질은 다르지만 아마도 H. D. 로렌스에게서 강한 영향을 받은 것처럼 보인다. 1938년 3월 평양방송을 통해 발표한 조지 버나드 쇼와 H. D. 로렌스를 중심으로 한「현대문학에 나타난 생명력에 대하여」에서 로렌스에 경주한 일면을 볼 수 있다.

순진한 정미(情美)를 느끼게 하는 루날의 뿌랑슈급 여인을 이상으로 한 효석은 "여인은 넥타이와 같은 것"이라 했을 정도이니, 그의 이상적 여인을 찾은 편력은 단편적이나마 복잡한 듯하다.

진부 우체국장 딸인 일녀 마이꼬는 평양으로 끈덕지게 편지를 보내왔고, 1941년 상처한 후의 평양 '방가로' 다방의 왕수복 여인은 방송에도 나가는 가수 마담으로 효석에게 정성을 바쳤다. 또 아직도 서울에 생존해 있다는 지(池)모 여인은 효석의 노블한 모습을 잊지 못하여 그 자손에게서나마 체취를 찾으려는 안타까운 연정을 간직하고 있다는 것이다.

효석은 그 부인 이씨를 못내 사랑하였다. 부인이 그보다 2년 전에 타계했을 때 자책과 고독에 몸부림친 것을 편지에서 찾아볼 수 있다.

1942년 봄 만주 출장 준비해 있던 현민에게 효석이 위급하다는 전보가 날아들었다. 여행 예정을 당겨 입원한 도립병원을 찾았을 때 "현민이 왔다"는 말에 알아들은 듯이 몸짓은 하였으나 말은 못하였다.

뇌막염으로 와병하여 입원한 지 10일 만에 절망 상태로, 기린리 자택으로 돌아와 2일 만인 5월 25일 하오 7시 30분 엄친과 왕수복 여인이 임종을 지켜보는 가운데 기어코 눈을 감고 말았다. 모친의 말에 따라 그의 유해는 향리인 진부에 와 묻히니 그 묘지가 부인과 함께 하진부리 고등골 낮은 기슭에 석대봉을 옆으로 하여 나란히 잠들어 있다.

3 # 살아있는 과거, 유종호, 「이효석」, 出 벽호출판, 1993.[ | ]

영서(嶺西)와 서울 사이

이효석은 1907년 2월 23일에 태어났다. 동시대의 우리 작가인 같은 강원도 출신인 김유정보다 한 살 위다. 신미(辛未)년 양의 해였던 1907년은 헤이그 밀사 사건으로 고종이 양위를 했던 해이다. 효석의 출생지는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동 681번지다. 산골이라고는 하지만 순한 산세가 아늑한 느낌을 주는 봉평면에는 태기산에서부터 흘러오는 시냇물이 봉평 마을을 둘로 갈라놓고 있는데 개울 건너 외떨어진 곳에 남안동이 있다.

한성사범학교를 나오고 뒷날 10년간 진부 면장을 지낸 전주 이씨 이시후와 강원도 홍천군 기린면 진동리 출신인 강흥경 사이의 1남 3녀 중의 외아들이었다. 딸만 낳아서 아들이 소원이었던 그의 어머니는 용꿈을 꾼 한 아낙네의 태몽을 논 몇마지기를 떼어 주고 산 이튿날 곧 잉태하여 효석을 낳았다 한다. 부친이 서울서 교편을 잡고 있어 네 살 때 모친과 함께 서울로 갔다가 여섯 살 때 가족과 함께 평창으로 내려가 서당을 다녔다. 작은 몸매에 유난히 귀가 커서 '귀대장'이란 별명으로 통하던 그는 이때부터 벌써 총기 좋은 재주꾼으로 동네 어른들의 귀여움을 받았고, 신동이란 평판을 얻었다.

여덟 살 나던 해 평창공립학교에 입학하였고, 1920년 3월 이 학교를 졸업하였다. 평창에서의 어린 시절이 그에게 의미했던 바는 그의 '영서 삼부작'이 대표작으로 남아 있다는 사실에 넉넉히 시사되어 있다. 《메밀꽃 필 무렵》과 같은 해, 그러나 몇 달 앞서서 씌어진 《영서의 기억》이란 수필로 미루어 그의 고향에 대한 애착을 짐작할 수 있다.

'우연히 시집《사슴》을 읽은 것은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잃었던 고향을 찾아낸 듯한 느낌을 불현듯이 느끼기 때문이다. 시집에 나오는 모든 소재와 정서가 그대로 바로 영서의 것이며 물론 동시에 이 땅 전부의 것일 것이다. 나는 고향을 찾은 느낌에 기쁘고 반갑고 마음이 뛰놀았다. 워어즈워드가 어릴 때의 자연과의 교섭을 알뜰히 추억해 낸 것과도 같이 나는 얼마든지 어릴 때의 기억을 드러낼 수 있게 되었다. 고향의 모양은 ―그것을 옳게 찾지 못했을 뿐이지― 늘 굵게 핏속에 맺히고 있었던 것을 느끼게 되었다.《사슴》은 나의 고향의 그림일 뿐 아니라 참으로 이 땅의 고향의 일면이다. 소재의 나열의 감쯤은 덮어 놓을 수 있는 것이며 그 곳에는 귀하고 아름다운 조선의 목가적 표현이 있다.'

평창 시절의 추억으로 그는 같은 반의 소녀에게 느꼈던 안타까운 회포를 적어 놓고 있다. 뒷날 서울 거리에서 우연히 다 자란 소녀의 모습을 보고 환멸을 느꼈다 한다.

이야기의 멋을 알고 문학이라는 것을 처음 생각해 본 것은 이 보통 학교 시절이다. 건넌방 벽장 속에는《사씨남정기》, 《가인기우》등속의 갖가지 소설책이 많이 있었는데, 그 가운데서 《추월색》에 감동하여 되풀이 읽었다. 추운 시절이면 머리맡에 병풍을 둘러치고 어머니와 나란히 누워 번갈아 가며 되풀이 읽었다. 병풍은 석류, 딱따구리 등의 그림이 그려진 것이었는데, 그 그림과 《추월색》의 이야기가 어울려서 신비로운 낭만적 동경을 가슴속에 심어 주었다고 뒷날 열 살 남짓한, 어린 시절을 회고하고 있다.

열 네 살 나던 해 보통 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무시험으로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경기 중·고교의 전신)에 입학한 그는 혼자 상경하였다. 1학년 때 젊은 영어 교사가 시간마다 소설 안 읽는 건 바보라는 소리를 해서 소설이 귀중한 것이라는 생각이 머리에 박혔다. 2·3학년을 기숙사에서 보냈는데 학생들 사이에는 문학열이 대단하여서 각자의 책꽂이에는 으례껏 두세 권의 소설이 꽂혀 있었다. 특히, 함경도 출신 학생 사이에 문학열이 왕성하여 러시아 문학이 많이 읽혔다. 《부활》이나 《그 전날 밤》은 마치 필독의 책이기나 한 듯이 누구나가 입에 올려 얘기하였다.

효석이 처음으로 알뜰히 독파한 작품은 소년 소설《쿠올레》였고, 일인이 번안한 《레미제라블》, 또 하이네 시에 심취하였다. 그러다가 체흡을 알게 되었는데, 그것은 다분히 함경도 학생들의 영향인 것 같다고 뒷날 이렇게 회고하고 있다.

「그들은 거개 의지가 견고한 우수한 학도들로 타도 사람으로서도 본을 받기에 족해서 내 자신 그들에게서 받은 영향이 큰 듯하다. 가장 많이 읽은 것이 체흡의 단편집이었다. 14·5세에 체흡을 읽는단들 그 맛을 알고 정확히 이해할 수는 만무하다고 생각되나 일종의 문학의 분위기를 그런 데서 터득했던 것은 사실인 듯하다.」

이 시절의 국내 작품 독서로 현진건의 《지새는 안개》를 들고 있는 효석은 예과 수험 준비를 하던 18세 때 준비를 겸하여 영문으로 셸리의 시를 탐독하였다. 문자 그대로 심취하여 짤막한 시를 기계적으로 암송하였다. 먼저 셸리의 용모에 끌리어 초상화에 반하고 전기에 흥미를 느꼈던 까닭에 그의 시를 좋아하게 되었다. 이것은 이효석의 낭만적 심미주의나 한때의 동반자적 자세를 이해하는 데 시사하는 바 많은 전기적 사실이라 할 수 있다. 그는 시 습작과 꽁트 습작을 적지아니 하였다. 19세 때 1월에 시《봄》이 처음으로 매일 신보에 게재되었고, 또 2월엔 꽁트《여인》이 같은 신문에 발표되었다. 당시 매일신보에는 일 주일에 한 번씩 중간되는 2면의 일요부록 문예면이 문학 작품을 위해 열려 있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문학소년적 열의에도 불구하고, 효석은 학업 성적도 뛰어나서 늘 10위 이내의 상위권에 속해 있었다. 19살 되던 1925년 경성제일고보를 우등으로 졸업하여 당시 동아일보에 우등 졸업자로 소개된 바 있다.

《노령근해》전후

3월에 졸업한 효석은 4월에 경성대학예과에 입학하였다. 세상의 부형이 흔히 그렇듯이 부친이 법과 진학을 강력히 주장해서 법학 지망인 문과 A를 택하였다. 독실한 문학 청년이 되어 있었던 그는 곧 고등보통 시절의 1년 선배인 유진오의 권유로 예과 동인클럽인 문우회의 일원이 되어 동인지 나 교우지 에 부지런히 우리말과 일본어로 작품을 발표하였다.

3·1운동 이후 조선총독부가 무단 정치를 완화하여 유화정책을 쓰지 않을 수 없었던 시기여서 국내 언론 출판이 비교적 활발해졌고, 오랫동안 숨막혀 있던 민족 감정이 여러 갈래로 분출하고 있었다. 한편 일본을 통해서 들어온 사회주의 사상이 지식인들 사이에서 풍미하고 있었다. 일본에선 이른바 '다이쇼 데모크라시'의 허위를 간파한 젊은 지식인들에게 사회주의 사상이 크게 호소력을 발휘하던 시절이다. 토오쿄오 대학의 신인회, 와세다 대학의 건설자 동맹과 같은 사회주의 지향의 학생 단체가 활발한 움직임을 보였고, 많은 학생들이 '브나로드'의 구호 아래 노동 운동이나 농민 운동에 투신하는 사실은 식민지의 특혜받은 청년들에게도 남의 일은 아니었다. 우리 나라에서도 효석이 예과에 들어가던 해 7월에 카프로 약칭되는 '조선 프롤레타리아 예술 동맹'이 결성되어 본격적인 프로 문학 시대의 도래를 예고하였다. 시대 사조에 민감했고 청년기 특유의 정의감으로부터 동떨어지지 않았던 '문우회'의 청년들이 어떠한 경향을 보여주었느냐 하는 것은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예과 시절에 효석은 적지 않은 수효의 꽁트와 시를 신문과 잡지에 발표하고 있다. 1학년 때 《황야》, 《누구의 죄》,《나는 말 못했다》를 발표했고, 2학년 때 《달의 파란 웃음》,《맥진》,《필요》,《가로의 요술사》등의 꽁트를 매일신보에 내고 있다. 가난한 인력거꾼이 노상에서 지갑을 줍게 되어 그것으로 술을 흠뻑 마시고 친구들에게도 선심을 쓴다는 줄거리의 《홍소》라는 작품은 '을상(乙賞)'이라는 상을 타서 5원을 받았는데, 그는 이것을 최초의 고료 수령 사례로 기억하고 있다. 이 밖에도 많은 시를 학생회지인 과 잡지 등에 발표하고 있다.

「문학을 일생의 업으로 작정한 그는 2년간의 예과 시절을 거쳐 학부에 진학할 때 일반 통념을 어기고 법과에서 영문학부로 전과해 갔다.」 법과쪽으로 옮기려는 사람은 많아도 법과에서 전과해 가는 일은 드물었다. 이 시기에 19세기 러시아 문학에 경도하고 있었다. 체흡의 애독은 고보 시절부터의 일이었지만 도스토예프스키, 투르게네프, 고리키 등을 감동과 생활상의 공감을 느끼면서 탐독하였다. 라스콜리니코프의 번뇌에서 이 땅 청년의 번뇌를 발견했고, 바자로프의 사상에서 당대 사상의 선구를 발견하였다. 바자로프의 정열이야말로 이 땅 청년이 가져야 할 정열이라고 흥분도 했다. 《그 전날 밤》속에 비록 주인공 자신의 혁명적 활동이 구체적으로 그려져 있지는 않으나, 불가리아의 한 민족적 투사의 기개와 정열은 그대로 당시의 계급적 투사의 그것으로 대치되어야 한다고 두 주먹을 불끈 쥐기도 하였다. 고리키의 《밤주먹》,《사십 년》,《어머니》를 감명 깊게 읽었다. 특히, 어머니가 점심 그릇 속에 삐라를 넣어 가지고 공장으로 들어가는 장면, 아들이 가두에서 시위하다 붙들리는 장면에서는 육체적인 공감을 느끼면서 《어머니》야말로 '참으로 진보적인 문학, 마음을 울리는 문학'이라고 감탄하였다.

전공인 영문학 쪽에서는 워어즈워드의 시, 맨스피일드의 단편에 매력을 느꼈다. 그러나 가장 공감을 느낀 것은 에이레 문학이었다. 똑같은 피압박 민족이라는 동류 의식, 빈궁과 정치적 억압 밑에서 참담한 생활을 하는 토착민에의 공감, 그리고 기질적 성향이라고 할 수 있는 애수에 대한 선호 등이 에이레 문학으로 그를 향하게 했다고 볼 수 있다. 예이츠의 초기 시편에 심취하였고 싱의 희곡을 좋아했다.

대학 생활은 크게 여유 있는 편은 못 되었다. 시골에서 부쳐주는 학비는 넉넉하지 못하였다. 외인 강사이던 블라이즈 교수에게 학비 보조도 받았다. 신문의 현상 문예에 익명으로 응모하여 현상금을 타가지고는 하숙방에서 친구들을 불러 술타령을 하며 가난한 청춘의 화려를 즐기기도 하였다. 번역도 하였다. 학비에 쪼들리고 생활이 궁색해도 밖으로 궁상을 내보이는 법은 없었다. 기질적인 낭만주의를 마음껏 발휘하고 생활의 귀족은 못 되어도 정신의 귀족은 되어야 한다고 다짐했다. 옷차림은 늘 말쑥하였고, 구두도 칠피 단화에다가 여자 구두 모양으로 나비 형상의 장식을 붙인 것을 신고 다녔다. 술도 말술 가는 주량이었다. 화려한 로맨스는 없었으나 두툼한 책과 원고지 사이에서 나날을 보내면서 작가 수업을 쌓았다.

22세 나던 학부 2학년 때 잡지 에 단편 소설《도시와 유령》을 발표했다. 건축 공사장에서 미장이 일을 하는 노동자를 일인칭 화자로 설정하고 전개되는 이 작품은 동대문이나 동묘에 숨어 들어가 잠을 자는 거지들을 도시의 유령으로 그려 놓고 있다. 밤에 푸른 불을 켰다 껐다 하는 것에서 시골의 도깨비불과 대비하여 도시의 유령이라 한 것이다. 처음 추리적인 궁금증을 일으키는 이 작품은 터놓고 계급 의식과 사회적 각성을 시사하는 말로 끝을 맺고 있다.

파인(巴人) 김동환(金東煥)의 호의적 인도에 힘입은 바 많았던 이 작품의 발표로 효석은 문단의 주목을 받기 시작하였다. 효석 자신도 '문단적으로 처음 소설이라고 썼던 것이 《도시와 유령》이었다'고 적음으로써 사실상의 처녀작임을 인정하고 있다. 이 밖에《기우》,《행진곡》등이 모두 재학 시절에 발표한 작품이었다. 1930년 대학을 졸업했을 때 그는 유진오와 더불어 유망한 동반자 작가로 그 앞날이 촉망되고 있었다. 그 해 여름 조선일보는 5대 작가의 한사람으로서 그의《마작철학》을 소개하고 있다.

식민지의 한 프티 인텔리

장래가 촉망되는 기예의 작가요, 또 그 수가 극히 영세하였던 대학졸업자(그는 경성대학의 제 2회 졸업생이다. 한국인 졸업생 수효는 많지 않았다. 영문과의 한 해 위 졸업생으로는 이재학, 박충집이 있었고, 한 해 뒤 졸업생으로는 평론을 썼던 최재서가 있었다)로 스물 네 살난 효석이 사회로 나섰을 때 그는 생활의 근거를 찾지 못하는 식민지의 한갖 창백한 프티 인텔리에 지나지 않았다.

효석이 대학을 나온 1930년이란 시점을 검토한다면 당시의 분위기를 얼핏 짐작할 수 있다. 1929년 11월은 광주학생운동으로 우리가 기억할 만한 연대이지만, 10월은 미국 뉴욕에서 주식이 크게 폭락하여 대공황이 시작된 시기이다. 이 미국의 공황은 세계적인 불경기로 이어졌지만 일본도 그 예외는 아니었다. 우선 무역 면에서의 타격이 컸다.

미국의 공황 때문에 생사의 수출이 격감하고 은값의 하락 때문에 은본위제였던 중국이나 인도에의 면제품 수출도 줄었다. 대학졸업자의 태반이 직장을 얻지 못했고, 특히 지식인층의 실업자가 격증하였다.

이러한 일본의 공황이 식민지에 즉각적인 충격을 준다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고학력자를 받아들일 사회적 기반이 한결 취약하였기 때문에 식민지의 대학 졸업생이 일자리를 얻지 못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현실적인 실의와 창작에의 정열을 안고 불안정한 룸펜 생활이 시작되었다. 효석은 수송동에 방 한 간을 얻어 기거하였다. 견지동에서 안국동으로 넘어가는 중간의 어떤 여염집에서 밥을 붙여 먹는 번거로운 생활이었다. 당시의 효석은 몸집도 키도 작고 살결도 희어서 여자 같은 인상을 주는 남자라고 동시대인들의 인상기는 기술하고 있다. 웃음을 호탕하게 웃지 못하고 입을 조물거리는데 얼굴까지 발개졌다 한다. 이 때의 생활은 책을 읽고 글을 쓰다가 피곤해지면 거리에 나가 다방의 음악에 귀를 기울이곤 하는 것이었다고 뒷날의 효석은 적고 있다.

서점에 들러 책을 뒤적여 보는 것도 낙이었다.. 당시 서울에는 '계림당서점' 이라고 하는 거의 유일한 좌익 서점이 있었는데, 오랫동안 출입이 잦았던 터라 창백한 룸펜 학사는 가끔 들러 보았다. 주인은 오랫동안 갇혀 있는 터였고 김씨 성 가진 사람이 운영하고 있었다. 하루 동안 책점 안에 눌러앉았던 그는 놀라운 사실을 하나 발견하였다. 고객의 대부분은 그가 예상한 대로 루바시카를 입은 장발 청년이나 첨단적 지식분자연하는 양복장이가 아니라 실로 중학생이었다. 아침부터 밤까지 이 서점을 찾는 수백 명의 손님 가운데서 99%가 머리를 짧게 깎은 교복 차림의 중학생이었다. 간혹 전문 학생이나 대학생도 끼어 있었으나 그 수효는 너무 적었다. 그는 돈을 벌려면 의학을, 지위를 얻으려면 법률을 지향하는 세태를 생각하고 새삼스레 법과를 버리고 문과를 택한 자신을 돌아보기도 하였다.

이 서점을 찾아 학비를 할애하여 책을 사고 하숙방에서 그것을 읽는 '지하실의 시커먼 무리'에게 미래의 희망을 걸기도 하였다.

외관과 복장만은 늘 깔끔히 하고 여성 교제도 드물지는 않았지만 생활은 어려웠다. 원고료라는 것이 아직 정해져 있지 않은 시절이었다. 신문에서는 그렇지도 않았지만 잡지에서는 값싼 술상으로 원고의 노고를 대신하거나 소액의 사례를 주는 것이 고작이었다. 수송동 셋방에 기거하면서 막벌잇군이 흔히 드나드는 싸구려 밥집에서 밥을 사 먹을 때는 혹시 아는 이에게 들키지나 않을까 하는 것이 한 걱정이었다고 그는 술회하고 있다.

실의와 빈궁의 무직 생활이 1년도 넘었을 때였다. 제일고보 시절의 스승이었던 일인 쿠사부카가 자리를 소개하여 무직 생활을 청산하였다.

그의 일자리가 총독부 가운데서도 경무국 검열계로서, 동족의 원고를 검열하는 일이라는 것을 처음부터 그가 분명히 알고 있었는지의 여부는 확실치가 않다. 이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은 찾아보기가 어렵다. 전혀 모르고 있었다는 것은 알 수 없는 일인 듯이 보인다. 그러나 처음 단계에선 단순히 총독부였다가 결정의 순간에 그 구체를 알려주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는 없다.

지식인 사이에서 대거 전향 사태가 일어나기 전이었던 만큼 비록 동반자적 과거가 없는 사람에게 있어서도 그의 일자리의 특수성은 소홀치 않은 갈등을 일으켰을 것이다.

예상치 않은 바는 아니었으나 친구와 지인과 문단의 공격은 용서 없이 신랄한 것이었다. 궂은 소문은 빨랐고 잡지의 가십란에도 야유의 대상이 되었다. 완전한 변적자 취급이요 앞잡이 취급이었다. 취직한 지 보름도 안되었을 즈음 직장에서 광화문통으로 내려오는데 R이라는 청년을 만났다. 문학을 하는 청년이었고 조금 안면이 있었다.

그는 다짜고짜 험상궂은 얼굴을 하더니 '너도 개가 되었구나.'하고 내뱉었다. 도로상의 봉변이었다. 금방 주먹으로 한 대 칠 듯한 기세였다. 그렇잖아도 신경이 약해 있던 판이었으므로, 그는 그 자리에서 졸도하고 말았다. 수송동 하숙에서 의식을 회복했을 때 그의 방에는 잡지사에 있으면서 소설을 쓰기 시작한 평소 잘 알던 최정희가 와 있었다. 이 삽화는 당시 널리 알려졌었지만 주위의 비판은 그치지 않았다. 그 후 그는 한 달도 안 되어 검열계를 뛰쳐나왔다. 몇 해 후에 그는 이 치욕적인 취직을 '미흡하고 어리석은 일신상의 실책'이었다고 적고 있다.

북위 42도와 39도

스물 다섯 날 나던 1931년은 효석에게 있어 다사다난한 해였다. 곤혹스러운 취직을 한것도 이 해였고, 첫 창작집 《노령근해》가 나온 것도 이 해이다. 6월 동지사에서 나온 이 첫 창작집엔 《도시와 유령》, 《기우》, 《행진곡》,《추억》,《북국점경》,《노령근해》,《상륙》,《부국사신》등 8편의 단편이 수록되어 있어 초기 이효석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으나, 뒷날 작가 자신도 성숙치 못한 됨됨이로 평가하고 있다. 그러나 표제만 가지고도 한때의 시대상을 알려주는 책자임에는 틀림없다.

7월에는 함경북도 경성 출신으로 효석보다 여섯 살 아래인 이경원과 결혼하였다. 전주 이씨 동성 동본인데 화랑에서 부인의 그림과 글을 보고 알게 되어 친구의 소개로 사귀기 시작한 사이였다 한다. 처가는 그후 몰락했으나, 당시만 하더라도 십만대의 호농으로 시골서는 뽐내는 편이었다. 장인은 일찍이 세상을 뜬 터요 장모와 손윗 처남이 하나인 단촐한 집안이었다. 수송동 집에서의 짧은 신혼 생활은 얼마 안 되어 끝났다. 총독부를 나오고 곧 처가가 있는 경성으로 낙향하였다. 북위 42도선이 지나가는 지경의 '아라사의 소문이 자주 들리는 곳', 6월에야 봄이 오는 북국의 변방이었다. 서울에서의 도회생활에 익숙해 있었고 또 도시가 주는 갖가지 편의와 문화적 혜택을 각별히 즐겼던 효석에게 변방으로의 낙향은 심히 불편스럽고 마음 무거운 일이었다고 추측된다. 그러나 곧 경성농업학교의 영어 교사로 취직이 되어 안정된 생활을 영위할 수가 있었고, 또 첫딸 나미도 보았다.

어버이되는 일의 즐거움과 무거움을 동시에 느꼈다. 학교 농장에서 매일 아침 돌려주는 신선한 우유를 먹이는 것이 즐거움의 하나였다. 실과 교사가 많은 교무실에서 그가 퍽 행복했으리라고는 생각되지 않는다. 여름이면 가까운 독진 해변에 나가 건강을 위해 해수욕을 하였다. 학교 농장에서 많이 나는 밤으로 샌드위치를 만들고 끓인 커피를 보온병에 넣어 가지고 가서 가을 바다를 몇 시간이고 바라보곤 했다고 그는 적고 있다.

경성의 마을에 정이 들면서 나남의 거리도 마음에 들었다. 경성서 십 리길, 버스로 10분이면 가 닿았다. 때로는 고갯길을 걸어서 혹은 기차와 버스로 자주 다녔다. '카레코'란 빵집에 들러 빵을 사기도 하고 '북광관'이란 서점에도 자주 갔다. 커피 한 잔을 마시려고 십리길을 타박거린 일도 있었다. 공원 옆에는 '동'이란 조촐한 찻집이 있었는데, 벽에 실러의 초상이 붙어 있는 이 집의 분위기가 좋아서 일요일이면 나남으로 갔다. 낮에는 사단의 졸병들이 법석을 떠는 바람에 주로 저녁에 들렀다. 밤 열 한시에 경성으로 마차가 갔다. 그 시각까지가 '동'에서 보낸 시간이었다. 주인은 지방 신문의 지사기자로서 토오쿄오에서 사회 운동에 투신도 하고 무산 정당 연설을 나갔다가 테러를 맞은 이력도 있는 위인이었다. 광부의 딸로 직업 전선 여기저기를 전전하다가 함께 살게 된 그의 아내, 동맹 휴교를 지도하다가 칼침을 맞았다고 상처를 보여주는 것이 자랑이나 이제는 거북한 식객으로 쿡 노릇을 하는 처남 등이 그런 대로 문학을 아는 처지여서 문학담을 나누는 것이 낙이었다. 청진에 재즈 싱거인 조세핀 베이커가 왔을 때는 이 '동'의 주인패와 어울려 택시를 몰고 40분은 달려가서 노래를 들었다. 고적을 이기지 못하여 일부러 서울에 편지를 부쳐 학교 선배요 문학 동료인 유진오를 맞아 회포를 푼 적도 있다.

비교적 고작이었던 경성 시절에 발표한 작품으로 특기할 만한 것은 1933년 10월 에 발표한 《돼지》이다. 처음 한자 표제 《돈》으로 나왔던 이 작품은 좋은 반응을 얻었고, 또 효석으로서는 하나의 전기를 이룬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짤막한 길이에 간결하면서도 정확한 필치로 소홀치 않은 밀도를 가지고 있어서 《노령근해》시대의 느슨하고 산만한 구성을 청산하고 있다. 효석의 작품치고는 극히 리얼리스틱한 이 작품을 고비로 초기의 취약성을 극복했다는 세평은 틀린 것이 아니다. 같은 해 여름에 문인 친목회인 가 결성되었다. 이무영, 유치진, 김기림, 정지용, 조용만, 이태준, 김유영, 이종명과 함께 효석이 창설 구성원으로 들어 있으나 곧바로 그만 둔 것으로 되어 있다. 지방에 있는 관계로 별 참석도 못하면서 어느 한 계파에 소속되는 것이 부질없다고 생각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후 는 구성원들이 들락날락하여 세칭 예술파 문인들로 보강이 되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만 3년 남짓한 경성 생활을 끝내고 평양으로 옮겨 산 것은 1934년 스물 여덟 나던 해이다. 그 후 타계할 때까지 눌러앉게 되는데, 효석으로서는 가장 생산적인 시기요, 또 만년의 불행을 별도로 친다면 가장 득의의 시절이기도 하였다. 처음 숭실전문학교에 있다가 그 후신인 대동공업전문학교 어학교수로 있으면서 그가 좋아하는 모든 것을 두루 즐겼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당대의 일반적 생활 수준을 염두에 둔다면 호화판이라 할 수 있는 '교외 생활자'의 남부러울 것 없는 생활이었다.

처음 이사했던 창전리 집은 현관에 담쟁이덩굴이 무성하고 화초밭이 갖추어진 양옥이었다. 효석의 화초 취미는 그의 글에 되풀이하여 나타나지만 그런 취향을 어느 정도 충족시켜 줄 만한 환경이었다. 특히, 장미꽃을 사랑했고 화원엔 즐겨 푸록스, 프리믈라, 카카리아 등의 희귀한 화초를 가꾸었다. 피아노를 한 대 사 놓고 식구들이 번갈아 가면서 건반을 눌렀다. 축음기도 장만하여 현관에서 노크하는 학생 내객들은 흔히 모짜르트의 바이올린 소나타의 멜로디를 들을 수 있었다. 쇼팽의 연습곡을 손수 치는 일도 있었다.

학교에서 퇴근할 적이면 '세르팡'이란 다방에 들러 음악에 귀를 기울이기도 하고 '낙랑'에 들러 코오피맛을 보다가 30분되는 귀로를 건강법삼아 일부러 걸어다녔다. 한참 들어오기 시작한 유럽 영화는 빠짐없이 구경하였다.

한 달에 영화 구경이 7·8차나 되는 달이 있다고 당시의 그는 잡지의 설문에 응답하고 있다.

양식을 좋아해서 집에는 버터나 통조림이 떨어지는 날이 없었다. 일요일에는 온 식구가 외식으로 양식을 즐기기도 하였다. 겨울이면 대동강에서 스케이팅을 하기도 했고, 여름 방학이 되면 온 집안 식구가 주을 온천으로 피서를 갔다. 평양 생활 후기에는 학교의 동료와 등산 구락부를 만들어 여름부터 가을 동안 배낭을 지고 스타킹을 두른 채 동룡굴을 뚫고 묘향산을 답파했다. 장수산을 정복하고 대성산을 밟고 일요일이면 가까운 사동이나 주암산을 돌았다.

그 사이 사회 정세나 세태 인심은 현격히 변해 있었다. 유명한 전주 사건 이래 프로 문학자들 중 많은 사람이 강요된 전향을 했고, 앞날에 대한 적절한 전망을 갖지 못하고 있었다. 효석의 말을 빌어서 말해 본다면 가진 사람이 가진 것을 부끄러워한 적이 있으나 이제는 그들은 자기의 유산을 터놓고 자랑하게 되었다. 효석의 '동반자적 경향'이란 처음부터 관념적인 것이요 강렬한 실천적 의지에 의해서 무장된 것은 아니었다. 시대 상황이 관념적인 동반자적 자세조차 허용치 않음에 따라서 그는 자기가 잘 알고 있는 세계에서 작품의 소재를 구하게 되었다. 여인에게서 구원을 찾고 30넘어서부터 현저하게 가슴을 두드리기 시작한 고향의 정서와 고향 사람들에게 관심을 돌렸다. 또 자기도 그 일원일지 모르는 옛 운동가와 사상 청년의 후일담에 각별한 관심을 기울였다. 한편, 그의 생활과 취향에 드러나 있는 유럽에 대한 향수, 자유에의 향수도 그의 문학의 소재가 되었다.

유럽에의 향수는 가령 유럽 영화, 양식과 커피와 서양 음악, 그리고 귀화 식물 등의 선호에서 볼 수 있는 다분히 표피적인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평양 시절은 문학적으로 극히 생산적인 시대였고, 그 후반에는 한국의 대표적인 단편 작가로 이태준과 나란히 거론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의 문학적 성숙은 단순히 연공의 소산이 아니라 익숙한 소재를 다루었다는 사실에 관련된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노령근해》의 작품들이 관념적 동반자 의식의 소산으로서 현실에 깊이 뿌리박지 못한 소재와 인물을 다루었다는 말과 같은 것이 된다. 문단에서의 평가도 긍정적인 것이었지만 독자들 사이에서의 반응도 좋았던 탓으로 '거의 유행 작가라 하여도 좋을 만큼 인기있는 작가의 한 사람이었다'고 유진오는 적고 있다.

평양으로 옮긴 뒤 차녀 유미와 장남 우현을 얻었고, 다시 차남 영극을 얻었다. 본시 내외가 건강한 편이 못 되었다. 효석 자신도 반생에 주사를 4백 대나 맞았고, 툭하면 약이요 요양이었다. 그는 기회 있을 때마다 건강이 가장 중요한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세 아기의 어머니가 되고 나서 부인의 건강은 이렇다 할 증세없이 나빠져 갔다. 구미를 잃고 불면증이 생기고 어딘지 모르게 몸이 축나면서 하루 세 때 약그릇을 극진히 대해 보았자 하루 이틀에 돌아서지 않는 병이었다. 의사도 이렇다 할 증세를 집어내지 못하였다. 네 번째 해산을 하고 나서부터는 영 병객이 되어 버렸다.

부인이 폐환으로 운명한 뒤이어 젖먹이 차남을 잃은 그는 불행의 연타를 맞은 셈이다.

이러는 중에 그의 눈앞에 나타난 여인이 왕수복이다. 평양 사람으로 인기 있던 미모의 유행 가수로 다방을 경영하고 있었다.

아끼는 사람들이 작가와 유행 가수는 어울리지 않는다고 우정에 찬 경고를 하였다. 그러나 오히려 그것은 그의 정열을 더욱 북돋아 주는 결과만을 낳았다.

주변에서 충고한 애정의 청산은 그러나 뜻하지 않은 방향에서 왔다. 1942년 5월 3일 창백한 얼굴이긴 했으나 평일처럼 출근했던 효석은 3시간쯤 학교에서 머물다가 병세를 이기지 못해 오후 2시쯤 귀가하였다. 가방을 들고 가는 걸음걸이가 심히 무거웠다. 곧바로 누웠는데 본인은 감기려니 정도로만 생각하여 이튿날 고열임에도 의사 부르기를 주저하였다. 심한 두통이 계속되었고, 6일 평양 도립병원에 입원하였다. 의식불명과 언어 부자유 상태가 계속되었다. 효석의 부탁으로 서울의 유진오에게 위독 전보를 친 날의 대화를 당시 학생으로서 간호에 임하였던 이재현이 기록하고 있다. 간혹 깊은 실신 상태로부터 정신을 차리고 가는 음성으로 말했다 한다.

「거리는 요사이 분주하지.」

「영화관에서는 무엇을 하나.」

「무엇 '사보이 호텔'을 해! 내가 그 영화를 본 날이 언제였던가? 그래 참 바로 재작년에 보았어! 참 무서우면서도 유쾌한 영화야.」

그러나 밤사이에 언어 불능 상태로 빠져 절망적이란 선언을 받고 퇴원하여 있었다. 5월 25일 오전 고열과 가쁜 숨으로 괴로워하다가 7시 30분에 절명하였다. 평양 기림리 집에서의 임종의 자리엔 부친과 왕수복이 지켜보고 있었다. 병명은 결핵성 뇌막염이었으며, 유해는 부친의 손으로 진부면 하진부리 논골에 묻혔다. 만 35년 3개월의 너무도 짧은 삶이고, 너무나 빨리 겪은 만년이었다. 부인과 사별 한지 만 2년 4개월만의 동행이었다. 부친 이시후도 일 년 후 중풍으로 돌아갔다.

살아 있는 과거

단명으로 끝난 효석을 두고 행복의 초상을 마련해 내기는 불가능한 일이다. 오복이란 전통적 행복관을 기준으로 친다면 그는 박복한 편이었다. 만년에는 젊은 부인의 사별과 참척이라는 불행을 겪었으며, 본인 자신도 병약한 반생이었다.

집안이 번창하여 화기애애한 왕래가 있었던 것 같지도 않고, 세속적인 부귀 공명에 둘러싸여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과욕한 기준에서의 대중이요 사회 전체의 일반적 수준을 척도로 할 때 그는 보기 드문 행운아였다고 할 수 있다. 그가 '자작의 아들도 아무것도' 아니었고, 또 천석꾼 지주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가령 동년배의 작가 김유정과 비교해 볼 때 그는 호사스러운 일생을 보냈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불쌍한 사람이 많되 유정만큼 불쌍한 사람도 드물었다.'고 김문집이 탄식했던 유정이 남겨 놓은 '탐정 소설 번역이라도 해서 돈 백 원이 마련되면 닭을 한 30마리 고아 먹고 구렁이라도 10여마리 먹어 기운을 차리겠다.' 는 편지를 읽을 때, 효석은 마치 서양 동화속에서 걸어나온 왕자와 같은 인상을 준다.

그의 생활 수준은 대부호나 대지주의 그것을 별도로 친다면 상류의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과 수필 등에 자주 나오는 주을 온천, 호텔에서의 외식과 우유 등의 식도락 취미, 커피, 음악, 화초, 영화, 등산, 여행 등은 그것이 비록 '생활의 귀족되기 어려워도 정신의 귀족되기는 쉽다.'는 뜻에서 정신의 귀족되기 위한 노력의 일환이라 하더라도 호강스러운 것이었음에는 틀림없다.

이러한 호강스러운 느낌은 이상옥이 지적한 그의 심미주의와 무관한 것은 아닐 터이고, 그의 심미주의 때문에 돋보였을 뿐 그렇게 야단스러운 것이 아니었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의 교원 생활이 매우 안정된 것이었고, 또 그의 생활을 상위 수준에 머무르게 할 수 있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이러한 생활의 안정과 '정신의 귀족' 생활이 그의 문학을 위해서 행복한 것은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의 작품에 수필이나 감상문적인 요소를 부여한 것은 그의 안정된 생활의 영향이 크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그의 '동반자' 시대부터의 한 버릇이랄 수가 있는데, '동반자' 시대 자체가 대학생이란 수혜적 신분의 생활과의 거리로 특징지을 수 있다. 효석의 동반자 시대의 작품에서 우리가 발견하는 것은 생활의 실감의 결핍이다. 당시의 작품 수준이 대체로 미숙한 상태에 있었다는 것을 참작하더라도 최서해의 일련의 단편이나 염상섭의 초기 단편이 거둔 성과를 고려할 때 효석에게서 보게 되는 생활의 결의 부족을 단순한 미숙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생각건대 그것은 그가 '관념적·관조적 혹은 심미적으로 세계와 생활에 대처했을 뿐이라는 사실과 관련될 것이다.

그의 동반자 시대의 작품이 프로 문학의 이상과 너무나 동떨어져 있다는 것은 많은 논객들이 지적한 바 있다. '운동'이니 '투사'니 하는 말이 튀어나오지만 그것 자체로서 뜻이 있는 것이 아니라. 그의 시를 위해서 있는 단순한 도구에 지나지 않았다는 취지의 유진오의 지적은 그 대표적인 것이다. 효석 자신도 《노령근해》시대를 가리켜 '이 때는 시대색도 뚜렷해서 누구나의 작품에나 일관된 채색이 있었다. 사실주의 시대인지는 모르나 기실은 낭만주의 시대였다. 자타를 막론하고 모두가 작품속에서는 단일한 꿈을 꾸고 있었다.'고 말함으로써 그것이 청년기의 낭만적 동경 이상이 되지 못하였음을 시인하고 있다. 일하는 사람의 난경과 소외된 노동의 고통스러움을 생활의 구체에서 전혀 보여주지 않고 있는 것은 그에게 경험 세계에의 의미 깊은 천착도 관심도 없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머슴살이에서 쫓겨난 인물의 머슴살이를 다루지 않고, 산의 정경만을 도시인의 눈으로 그리고 있는《산》은 효석의 작품 세계에 대해 하나의 시사적인 모형이 되어 있다.《산》의 그러한 성격은 효석이 동반자의 자세를 벗어났기 때문이 아니라 그 이전의 작품에도 고스란히 해당되는 것이다. 《분녀》같은 작품이 일하는 사람의 어려움도 또 성적 폭행에 대한 사실적인 작품도 되지 못하고 반은 행실 나쁜 처녀의 순례같이 되어 있는 것도 생활과 경험 세계에 대한 적절한 관심과 흥미의 부족에서 오는 것이다. 고리키를 읽고 감격했는지는 모르지만 작가로서 배운 점은 전혀 없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경험 세계로 직접 투신하여 관찰하고 생각하기보다는 한옆으로 비켜서서 꿈꾸고 관조하고, 그리고 정신의 귀족되기를 추구했던 것이다.

여름꽃만이 있는 화단의 정리야말로 자기의 최대 관심사라는 술회는 사사로운 관심이 가장 중요하다는 실감을 정직하게 토로한다는 일면은 있으나 그의 작가적 관심과 안목의 협착한 한계성을 노출하고 있기도 하다. 이러한 '아적 관점'과 그의 수필적 작품의 친근성은 너무나 명백하다. 동반자적 경향에서 벗어났다고 생각되는 시기에 쓰인 《돼지》,《일기》,《수탉》등이 그래도 경험 세계와의 친근성을 유지하면서 사실적인 밀도를 가지고 있는 것은 작가가 잘 알고 있는 비근한 세계를 다루고 있다는 것과 관련되는 것일 터이다. 《일기》와《수탉》은 그의 교직 생활에서 따온 소재요, 《돼지》는 그 점 색다르나 인물 묘사는 삽화로 머물러 있어 크게 다른 세계는 아닌 것이다.

효석의 동반자적 경향 자체가 문학 청년의 낭만적 동경의 일환이지만 그의 안정된 생활에 기초한 사생활 숭상은 그의 작품에 여기(餘技)적이고 딜레탕트적인 성격을 부여해 주고 있다. 그러한 국면은 그의 작품들이 밀도 있는 구심점을 중심으로 회전하지 않고 있다는 점에도 드러난다. 이 책에 수록된 단편들만 하더라도 허황하지 않게 사실적인 진실성에 도달해 있다고 생각되는 《돼지》,《일기》,《수탉》의 세계, 작가의 분신적 인물이 아닌 고향 사람들을 다룬 《메밀꽃 필 무렵》,《개살구》,《산협》등의 영서 삼부작, 《노령근해》,《해바라기》,《일표의 공능》등 전일담과 후일담,《황제》,《풀잎》등의 만년 작품이 확연히 구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범주를 벗어난 수필적인 작품이 허다하다. 이러한 소재와 작품 세계의 다양성은 그러나 레파토리의 다양성과는 달리 득의의 단골 영역이 없다는 결과를 낳았다. 가령 동료인 이태준이 '소설이란 인간 사전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고 술회하고 그러한 술회가 자연스럽게 생각되게끔 인물에의 관심을 지속적으로 작품에서 보여주었다는 사실, 혹은 같은 동료인 김유정이 토착적인 유머를 주축으로 하면서 고향의 가난한 삶을 진솔하게 보여주어 구심성 있는 독자적인 작품 세계를 이루어 놓은 것과는 대조가 된다. 그리고 그러한 대조속에서 효석의 자리가 대체로 산만한 성격을 가지고 있는 것은 취약적이라고 인정될 수밖에 없다. 여기에 대해서 성(性)이 의젓한 단골 영역이 될 수 없겠느냐는 물음이 있을 수 있다.

그러나 독자적인 윤리로 무장하지 않은 단편적인 시사는 인간의 삶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비중을 비근한 관점으로 확인시켜 줄 뿐 각별한 의미는 없는 듯이 보인다. 이렇게 생각해 볼 때 그의 안정된 생활과 그 속에서의 귀족 취미, 그리고 사생활의 숭상이 문학적 행복으로 귀결하지 못한 것은 분명한 듯이 보인다.

효석에게 드러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특성은 유럽에 대한 동경이다. 물론 이러한 동경 혹은 향수는 그의 낭만적 심성에서 나온 낭만적 동경의 일환으로 파악할 수가 있다. 유럽이라는 것도 구체적으로 파악한 어떤 실체가 아니라 모호하게 심정적으로 그리는 막연한 대상이다.

그가 침대를 쓰고 있었다던가 우유나 커피를 기호했다던가 하는 표피적인 것은 널리 알려져 있다. 서양 음악과 영화를 좋아했고 영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러시아 문학에 끌렸고 나중에는 그쪽의 심미주의적 문학으로 기울어져 갔다. 그에게 있어 유럽은 이러한 선호의 원천이었으며 구질구질한 현실을 넘어서는 현실의 한 대안으로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황제》에서 보았듯이 그의 서양은 미래 지향적인 역사 의식이나 혹은 일정한 문명 비판적 안목에서 선별된 가치 체계라기보다는 그에게 있어서의 또 하나의 낭만적 동경의 계기였던 것이다. 지금 이 곳에 있지 않기 때문에 멀리 떨어져 있음이 그대로 '향수'의 계기가 되었던 것이다. 유럽적인 것의 변형으로서의 이국 정조, 취향이 얼마나 낭만적이며 심정적인 것인가 하는 것은 《하르빈》,《여수》와 같은 작품 속에 드러나 있다.

이러한 유럽에의 낭만적 동경은 효석의 작품에 독특한 시정을 낳게 한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현실에 뿌리박지도 또 단단한 실체에 매여 있지도 않아서 한갖 호들갑스러움이나 젊음의 객기로 떨어져 있다는 혐의도 없지 않다. 의외로 빨리 호소력을 잃어버린 작품이 이 계열의 작품이라는 것은 주목에 값한다. 효석을 애정의 눈으로 바라보는 관점의 하나는 이상옥이 보여주었듯이 일관된 심미 주의로 그의 작품 세계의 일면을 파악하고 설명하는 것이다. 이때 《벽공무한》,《화분》등의 작품이 각별한 참조의 준거로 등장하게 마련인데, 이들 작품이 일종의 조숙한 등장으로 말미암아 작위성과 현실 유리가 두드러진 것 또한 부정할 수 없다.

서구 취향의 흔적이 가장 현저하게 나타나 있는 것은 그나마 간결하면서도 정갈한 문체에의 의지, 그리고 견고한 구성에의 의지로써 그 점에 있어서 우리 옛문학의 사실이나 입심과 구별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취향과 교양의 수준에서 머물러 있는 것이기 때문에 서구 취향을 또 쉽게 벗어버릴 수가 있었다. 우리말 잡지가 모두 폐간되고 창작 생활의 영위가 일어로밖에 계속될 수 없었던 시절에 효석이 보여준 작품에 《은은한 빛》이나《청자와 소복》이 있다. 모두 우리 고유의 것에 대한 애정과 애착을 기리고 있어 우리의 눈을 당긴다.

유럽 선호가 비록 일시적이라 하더라도 탈락되어 있는 것은 그것이 육체의 일부로 내면화된 것이 아니고 취향과 교양 수준에 머물러 있었다는 것과 무관하지가 않을 것이다. 한편, 그가 어느 한 경지에 안착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조그마한 변화를 찾고 있는 것은 정한모가 지적한 그의 '향수'와도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8·15이후의 분단 상황은 우리 현대 문학의 유산을 '온당'과 '불온'으로 나누어 가뜩이나 가난한 유산의 궁핍화에 박차를 가하게 하였다. 많은 문학이 단순히 그 작가가 8·15이후의 행동거지에 문제점이 있다 해서 우리 문학의 유산 목록에서 제외되어 버렸다. 그리하여 요절로 말미암아 8·15를 경험하지 못한 시인·작가들이 과분한 유산 중 여자로 간주되어 온 감이 없지 않다. 한용운, 김소월, 이상화, 최서해, 현진건, 이상, 김유정, 이효석, 이육사, 윤동주와 같이 비교적 큰이름에 나도향, 이장회 같은 이름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이들의 작품은 사화집과 교과서에 자주 수록되어 실제 이상으로 커 보이는 이도 재중에는 있을 것이다. 그러한 의미에서 이효석도 과도한 평가를 받았다는 혐의가 없지는 않다.

정명환의 효석론인 <위장된 순응주의>는 효석이 가면을 쓴 순응주의자였으며 문학이 현실의 탐구가 아니라 현실의 은폐를 위해서 있었다고 분석하면서 효석이 한국 문학사에서 차지하는 지위가 극히 미미하다고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지적은 대체로 타당한 근거 위에 서 있는 듯이 보인다. 효석이 염상섭만한 현실 파악이나 그 조형의 성취를 이루지 못했으며 크기에 있어 취약하다는 것은 사실일 것이다. 또 어느 특정 주제를 구심점으로 하여 그것을 농도 있고 밀도 있게 추구한다는 점에서 이상이나 김유정에 미치지 못하는 면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당대의 시인·작가를 놓고 엄격한 준거틀을 기준으로 검토할 때 순응주의에서 벗어나 있고 현실 탐구를 위해 문학이 있는 치열성을 견지한 작가로 남아나는 사람이 별로 없으리라는 것도 부정 할 수 없다. 그가 보인 문체에의 의지도 그렇게 손쉽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뿐만 아니라 우리의 빈약한 현대문학의 유산 속에서는 반드시 양이 문제인 것도 아니다. 가령 《해바라기의 비명》이란 단 한편의 시민을 가지고도 함형수는 우수한 시인이란 이름에 값한다고 할 때 이효석의 몇편은 우리의 단편 문학에서 희귀한 보석임을 그치지 않을 것이다.

이효석을 읽으면서 우리는 그와 그의 동료 작가들이 매우 열악한 조건 아래서 문학 생활을 영위했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확인한다. 식민지의 상황이라는 조건만을 염두에 두고 하는 소리는 아니다. 효석의 세대는 아마도 전통적 한문학이나 구비적 민중 문학 어느 쪽과도 깊은 교섭을 하지 못한 채 근대 서양을 준거틀로 문학을 구상하고 실천한 초기 개척자들이다. 이들의 한계와 실패는 전례없는 실험이라는 전체적 맥락 속에서 이미 부분적으로 결정되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유럽에 대한 향수를 동력으로 하고 있는 근대주의의 모순과 자기 상실을 예시하고 있다는 점에서도 이효석은 하나의 뜻깊은 계고적 모형으로 남아 있다.

4 # 《메밀꽃 필 무렵》바로 읽기, 진채호, 『메밀꽃 필 무렵 외』, 혜원출판사, 1997.[ | ]

이효석의 생애와 작품 세계

이효석은 우리 나라 문학사에서 가장 서정적인 경향의 순수 작가이다. 그는 36세로 생애를 마치기까지 3편의 장편소설, 2편의 중편소설, 그리고 60여 편의 단편소설과 80여 편의 수필, 10여 편의 시와 평론등을 합해서 200여 편의 작품을 남겼다.

그의 순수 문학은 주로 자연과 공존하는 인간의 원형을 추구하면서 서정성에다 바탕을 두고 본능적인 인간 생활의 미화와 자연의 원초적 상황을 순화시켜 주고 있다. 특히 그의 대표작이자 한국 서정 문학의 정수(精髓)인 <메밀꽃 필 무렵>은 언어예술이 도달할 수 있는 한 정점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이효석은 1930년대라는 특수한 상황과 일제의 억압을 극복하는 과정속에서 소설이라는 서사적 양식을 통해 시적인 서정의 세계와 인간 본능의 원초적 순수성을 결합시켜 서정 미학의 극치를 이루어 냈다. 그는 좌절된 당시 지식인들의 억누를 길 없는 우수(憂愁)를 자연과 인간의 본능, 그리고 성(性)이라는 특이한 프리즘을 통해 표출해 내었다.

그의 작품 세계는 반산물적인 서정성과 자연귀의(自然歸依), 그리고 순수지향

의 원초성을 특징으로 한다. 그가 활동했던 1930년대의 사회적인 상황, 즉 일제의 혹독한 식민 정치라는 특수한 상황을 감안할 때 그의 순수한 서정의 산문세계는 현실를 도외시했다는 점에서 비판을 받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도피의 유희라 할 수 없다. 오히려 그의 문학은 현실적 대상의 위험한 관조보다 영원한 인간 내면의 순수성을 표현하기 위해 산문 대신 서정적 시 정신에 접근했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 받아야 할 것이다.

1930년대는 정치 사회적으로 매우 불안한 시기였다. 특히 만주사변이후 일제의 탄압이 더욱 거세져 문학·사상·언론 등에 대한 그들의 혹독한 탄압이 절정에 이르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카프 계열의 현실 참여적인 작가들의 문학 활동은 억압되었고, 나아가 순수한 문학 작품의 출판 자체도 어려워지게 되었다. 또한 세기적인 공황으로 인해 전세계적으로 실업 사태가 계속되었고, 그러한 사회적인 불안함은 개인의 세계에까지 불안과 어둠의 그림자를 드리웠다. 이러한 시대적 어둠과 개인의 정신적 불안 속에서 작가들은 고독한 내면의 세계에 침잠하거나, 현실로부터 벗어나려는 도피주의 경향을 띠게 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이러한 상황 속에서 새로운 대안 문학으로 순수주의라 부를 수 있는 일련의 예술지상주의 문학운동이 일게 되었다. 즉 현실에 관심을 두는 대신에 그 동안 잊고 있었던 민족 고유의 서정적인 정서, 그리고 인간 본연의 문제를 문학의 주제로 삼게 되었던 것이다. 순수한 인간 본능의 삶과 원초적인 자연에의 회귀를 서정적인 시정(詩精)으로 표현했던 이효석은 바로 그러한 흐름의 선두로서 황폐해 있던 당시 문단에 새로운 활력을 되찾아 주었다.

이렇듯 이효석은 비록 시대의 불행이라는 외압에 의해 서정의 문학으로 자신의 주제를 바꾸었지만, 그의 서정성에는 단순한 도피적 유희가 아닌 한 인간의 진실된 내면 세계가 반영되어 있다. 즉 그의 서정 소설은 1930년대라는 시대적 우울 속에서도 인간의 내면 속에 삶의 열정을 잃지 않으려는 건강한 삶의 의지가 내포되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으며, 현실의 부정성을 간접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그의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현실적 삶에 내포된 모순을 부정하고 자연의 삶이나 과거의 삶을 지향하면서 세계와 화합하는 것을 열망하는 특징을 보여 주고 있다.

동반자 작가로서의 첫출발

가산(可士) 이효석(李孝石)은 1907년 2월 23일, 강원도 평창군 봉평면 남안동에서 이시후(李始厚)의 1남 3녀 중 장남으로 출생하였다. 아버지 이시후는 <font face="인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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