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영미

시인의마을

1 # 선운사에서[ | ]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 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2 # 가을에는[ | ]

내가 그를 사랑한 것도 아닌데
미칠 듯 그리워질 때가 있다
바람의 손으로 가지런히 풀어놓은, 뭉게구름도 아니다
양떼구름도 새털구름도 아니다
아무 모양도 만들지 못하고 이리저리 찢어지는 구름을 보노라면
내가 그를 그리워한 것도 아닌데
그가 내 속에 들어온다
뭉게뭉게 피어나 양떼처럼 모여
새털처럼 가지런히 접히진 않더라도
유리창에 우연히 편집된 가을 하늘처럼
한 남자의 전부가 가슴에 뭉클 박힐 때가 있다
무작정 눈물이 날 때가 있다
가을에는, 오늘처럼 곱고 투명한 가을에는
이 세상에서 가장 슬픈 표정으로 문턱을 넘어와
엉금엉금, 그가 내 곁에 앉는다
그럴 때면 그만 허락하고 싶다
사랑이 아니라도, 그 곁에 키를 낮춰 눕고 싶다

3 # 어떤 사기[ | ]

진달래가 이쁘다고 개나리는 안 이쁜가

내가 아는 어떤 부르주아는 연애시를 쓰려고 연애를
꿈꾸는데

행을 가른다고
고통이 분담되나

연을 바꾼다고
사랑이 속아주나

아, 그러나 작은 정열은 큰 정열이 다스려

그리고...... 그런데...... 그래서......

사람들은 내가 이혼한 줄만 알지
몇번 했는지 모른다

4 # 북한산에 첫눈 오던 날[ | ]

미처 피할 새도 없이
겨울이 가을을 덮친다

울긋불긋
위에
희끗희끗

층층이 무너지는 소리도 없이
죽음이 삶의 마지막 몸부림 위에 내려앉는 아침

네가 지키려 한 여름이, 가을이, 한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가는구나

내일이면 더 순수해질 단풍의 붉은 피를 위해

미처 피할 새도 없이
첫눈이 쌓인다

5 # 인 생[ | ]

달리는 열차에 앉아 창 밖을 더듬노라면
가까운 나무들은 휙휙 형체도 없이 도망가고
먼 산만 오롯이 풍경으로 잡힌다

해바른 창가에 기대앉으면
겨울을 물리친 강둑에 아물아물
아지랑이 피어오르고
시간은 레일 위에 미끄러져
한 쌍의 팽팽한 선일 뿐인데

인생길도 그런 것인가
더듬으면 달음치고
돌아서면 잡히는
흔들리는 유리창 머리 묻고 생각해본다

바퀴소리 덜컹덜컹
총알처럼 가슴에 박히는데
그 속에
내가 있고 네가 있고
아직도 못다 한 우리의 시름이 있는
가까웠단 멀어지는 바깥세상은
졸리운 눈 속으로 얼키설키 감겨오는데
전선 위에 무심히 내려앉은
저걸,
하늘이라고 그러던가

6 # 내 속의 가을[ | ]

바람이 불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높고 푸른 하늘이 없어도
뒹구는 낙엽이 없어도
지하철 플랫폼에 앉으면
시속 100킬로로 달려드는 시멘트 바람에
기억의 초상들이 우르르 몰려왔다 흩어지는

창가에 서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따뜻한 커피가 없어도
녹아드는 선율이 없어도
바람이 불면
오월의 풍성한 잎들 사이로 수많은 내가 보이고
거쳐온 방마다 구석구석 반짝이는 먼지도 보이고
어쩌다 네가 비치면 그림자 밟아가며, 가을이다
담배연기도 뻣뻣한 그리움 지우지 못해
알미늄 샷시에 잘려진 풍경 한 컷,
우수수

네가 없으면 나는 언제나 가을이다
팔짱을 끼고
가---을

7 #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 | ]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재미없는 소설책을 밤늦도록 붙잡고 있는 건
비 그친 뒤에도 우산을 접지 못하는 건
짐을 쌌다 풀었다 옷만 갈아입는 건
어제의 시를 고쳐쓰게 하는 건
커피도 홍차도 아니야

울 수도 웃을 수도 없어
돌아누워도 엎드려도
머리를 헝클어도 묶어보아도

새침 떨어볼까요 청승 부려볼까요
처맨 손 어디 둘 곳 몰라
찻잔을 쥘까요 무릎 위에 단정히 놓을까요
은근히 내리깔까요 슬쩍 훔쳐볼까요
들쑥날쑥 끓는 속 어디 맬 곳 몰라
계절이 바뀔 때마다 가슴속 뒤져보면
그래도 어딘가 남아 있을, 잡초 우거진
내 마음의 비무장지대에 그대, 들어오겠나요
어느날 문득 소나기 밑을 젖어보겠나요

잘 달인 추억 한술
취해서 꾸벅이는 밤
너에게로, 너의 정지된 어깨 너머로
잠수해 들어가고픈

비라도 내렸으면


 

서울대 서양사학과 졸업
홍익대 미술사학과 대학원 졸업
1992년 『창작과비평』겨울호에 속초에서외 7편의 시를 발표하면서 작품활동을 시작
1994년 첫시집 『서른, 잔치는 끝났다.』를 간행
1997년 시대의 우울 간행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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