헤드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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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 헤드윅 OST[ | ]

Original motion picture soundtrack Hedwig and the Angry Inch

헤드윅

height=400   우리 시대에 60년대 캠프의 유토피아적 성향과 에드 우드 시대의 심야 상영관의 전략들이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 록큰롤은 여전히 비주류의 분출구로서 유효한 방식으로 작용하는가? ‘포스트-펑크 시대에 네오-글램의 정서를 불러일으킨다’고 말해지는 음악극 을 통해 이런저런 질문을 해볼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사실 의 성공이 기뻐서(비록 국내에서는 적은 수의 개봉관에서 상영되는 것에 그쳤지만), 또 성적 소수 그룹의 이야기가 당당하게 주말 상영작품 프리뷰에 빠뜨려져 있지 않은 것에 반가움을 표시하느라 이 영화가 가진 전략을 제대로 살펴보질 못했다. 사실, 특별히 의문을 표할만한 전략상의 문제가 있느냐고 한다면 그렇게 큰 소리로 떠들만한 것이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그 작은 성공이나마 칭찬해주고자 하는 것이므로 이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해볼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이 영화의 음악적 전략과 맞물리는 이 불러일으킨 반향에 대해 생각해보도록 하자.

1970년에 만들어진 니콜라스 로에그와 믹 재거의 언더그라운드 필름 는 ‘난잡한 성과 마약의 문화를 그린 것’으로 개봉 당시에는 비난을 받았다. 오늘날 이 영화가 모더니즘이라든가, 카운터 컬처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혹은 모든 성향의 섹슈얼리티를 반영하는 편견없는 이상향을 그린 작품이라고 말해진다면, 실제로 개봉관에서는 더 이상 볼 수 없는 이런 영화들이 갖는 의미가 영화이론에서나 문화이론에서만 가능한 것이 아닌 그 이상의 무엇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 있을까? 아니면, 가 니콜라스 로에그의 정말 취향 한번 독특한 바로크적 과잉과 믹 재거라는 록큰롤 이단아, 혹은 말썽꾸러기 아이콘으로 70년대 시작 무렵에 주도적인 도덕률과 무관한 불편함을 선사했다고 치자. 그러나 지금 그 영화를 다시 본다고 해서 그 불편함이 사라졌을까? 의 미덕은 ‘영원한’ 언더그라운드 영화로서 존재하는 것에 있다고 말한다면 참 불쾌한 소리가 될 수도 있겠지만 아직은 그렇다고 볼 수 있다.

height=300   명백히 반유토피아적이며, RKO 사의 현수막은 오손 웰즈의 시대를 역설적으로 연상시키고, 쌀 세례를 맞으며 버진으로부터 탈출하는 성적 쾌락이 자유의 획득이라고 설복되어지며, 심야 영화 상영 문화의 인터액티브 시대를 가장 현란하게 열어 젖혔다고 생각되었던 <록키 호러 픽처 쇼>가 더 이상 상영되지 않는 이 시대에 다시 한번 그런 컬트를 가지고 싶어하는 관객들의 욕망은 다시 발생될 수 있을까? 혹은 그런 욕망이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록키 호러 픽처 쇼> 자체가 의미하는 것에 대해서는 별로 말해지지 않았지만, 왜 이 영화가 성공했는가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분석이 행해졌다. 혹자는 프랑켄퍼터 박사가 이 시대의 문어발 엔터테인먼트 그룹들의 모토를 외치는 것과 같다며, 관객들을 마취시키는 이 영화의 전략이 루퍼트 머독네와 다를 바 없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 영화의 성적 향연의 축제에서 리비도의 긍정적인 면을 보거나 억압적 시대 상황에서 비롯한 카운터 컬처의 전형으로 본다. 아니면 그냥 음악과 춤의 조화로운 떠들썩한 무대극으로 본다. 그리고 어느 쪽이든 거의 20년 가까이 지속된 컬트라는 것에는, 즉 그것이 관객들과 맺은 결탁을 통해 보여준 힘에 대해서는, 그것이 현상적인 것이었으므로 동의한다(비록, 데릭 저만이 펑크 정신 그 자체를 보여준 작품이라고 호평받은, 형식과 내용 모두에서 무정부주의의 깃발을 날렸던 에서 프랑켄퍼터 박사의 외침 ‘꿈은 그만 꾸고, 이제 직접 돼봐라Don't dream it, Be it’를 반어적으로 사용했음이 기억에서 지워지지 않지만).

그렇다면 은 어떠한가? 이 영화의 감독인 존 카메론 미첼은 ‘은 <록키 호러 픽처 쇼>보다는 더 지적인 영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가 살아남을 수 없었던 것과는 다르게 이 가진 미덕이 있다면, 그것은 <록키 호러 픽처 쇼>보다 ‘더 지적인’이라기 보다는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이기 때문일 것이다. 최소한 ‘정치적으로 더 올바른 것처럼 보이는’에 방점이 찍힌 것 때문이라고 생각되어진다. 오늘날의 젠더와 섹슈얼리티의 문제는 기존 모더니즘 담론들을 뒤흔들고도 남는 위력이 있다. 그것은 이론에서 시작하여 생긴 위력이 아니라 실제적인 운동들, 의사표명, 행동들에서 시작한 것이다. 은 부분적으로는 펑크의 애티튜드를 가지고 있지만, 더 이상 반유토피아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플라톤까지 거슬러 올라가 부인할 수 없는 고전에 기인한 주석을 달며, 성적 공존의 화합 무드를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것과 조응시키며 펼쳐 보여준다. 동서화합이 거론되는 이 마당에, 또한 헤드윅이 트랜스베스타이트가 될 수밖에 없는 이유가 서방세계로의 탈출을 위한 것, 즉 정치적 자유라는 더 큰 대의에 있기 때문에, 비록 이 영화가 트랜스젠더 문화에 대해 표명하는 적극적 지지가 그 대의에 살짝 묻힌다할지라도 이 영화의 ‘정치적으로 올바른’은 정말 큰 호소력을 갖게 된다. 헤드윅과 성난 1인치가 표명하는 파괴의 기질과 비정형성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주인공의 굴곡 많은 인생에 공감을 표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리고 주인공은 자신을 음악인으로 거듭나게 해 준 은인을 저버린 이성애자 청년을 고발해도 세상은 들어주지 않는 상황에 처한다. 정말 안타깝다. height=200   height=200  

게다가 이 청년 토미 그노시스가 스매싱 펌킨스의 데뷔 앨범 『Gish』 시절의 정말 분투했던 빌리 코건을 닮았기 때문에 참 난감한 상황이 된다. 토미 그노시스가 『Adore』 시절의 빌리 코건만 닮았어도 모든 사람들이 흑백을 가리기가 쉬웠을 것이다. 에는 진흙 범벅이 되어 놀아야 마치 제대로 노는 것처럼 생각하는 젊은이 위주의 과격한 록페스티벌과 달리, 여성을 위한 차분한 분위기로 진행되는 페스티벌 ‘릴리스 페어’를 연상시키는 ‘멘스 페어(mense fair)’도 나온다. 여기서는 단 한명의 고딕 취향의 소녀만이 공연을 보러온다. 실제 ‘릴리스 페어’가 거두었던 성과가 무시된 것 같기도 하지만, 의 미덕이 자신의 비극을 신랄한 어조로 전달하는 것에 있다면 ‘릴리스 페어’가 가진 여성성과 모성에 대한 믿음이 지속되지 못하는 상황에 대한 서글픈 감정을 성공적으로 전달하고 있다고 생각하게 될 것이다.

오프-브로드웨이 무대에서 비롯되었으며, 음악극인 것에 중점을 두고 있는 의 영화적 스타일은 애니메이션의 차용이나 초현실주의적인 셋팅 등으로 노래의 의미 전달을 효과적으로 만들고자 한 비주얼의 구성이 압도적이다. 또한 한셀 시절의 헤드윅이 미군을 만나는 장면의 교회터의 배치나 젤리와 같은 소도구는 니콜라스 로에그의 취향을 받아들인 것처럼 보이고, 이것 또한 캠프 진영의 화려함을 끌어들인 것이다. 이 영화의 음악은 화려함에 관해서는 록큰롤 역사상 아방-훵키 조지 클린턴 일당과 맞먹는 글램을 차용하고 있다고 명백히 말해지고 있지만, 글램은 사실상 음악 스타일의 경향이라기 보다는 아티스트쉽의 문제이다. 그래서 반짝이 의상과 요란한 메이크업은 물론이고 데이빗 보위와 티렉스의 음악을 고려한 작곡자의 의도라는 측면에서 글램이라고 말해도 무방하겠지만, 혹자의 말대로 이 영화는 ‘다 함께 따라부르기’의 전형을 보여주는 <록키 호러 픽처 쇼>의 음악을 계승하고 있는 온갖 음악적 스타일을 보여준다. 사랑과 회한의 발라드에서, 애짓-프롭(agit-prop)의 계도적인 찬가 「Origin of Love」, 얼터너티브 시대의 기타 운용을 보여주는 트랙들, 그리고 군데군데 컨트리와 디스코의 흥겨움도 있다. 즉 의 음악에는 과잉의 전략이 더 이상 위반이 아닌 지점으로 미끄러져 들어가며, 동시에 음악적 절충주의로 내닫는 포괄적 측면들이 있다. 은 더 이상 대항할 대상을 설정하고 있지 않은, 그래서 카운터 컬처의 밖으로 뛰쳐나온 영화이다. 이 영화를 통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은 트랜스젠더와 같은 성적 소수자의 문제가 음악극의 화려함 속에 보편적 문제 제기로 받아들여지기 때문일 것이다. 한편 아쉬워하는 사람이 있다면 이 영화가 ‘더이상 게이 영화나 트랜스젠더 영화가 아니며, 걸작으로 평가받는 이유는 오로지 재미있기 때문이다’라는 평을 보면서 뭔가 빠진 것이 있지 않나 싶어서일 것이다. 혹은 파라 포셋 가발의 아름다운 드랙 퀸 헤드윅이 아니라, 이츠학이 트랜스젠더의 진정한 대변인이라고 생각하며 이츠학의 역할을 여배우가 했다는 것이 좀 감동을 반감시킨다고 여겼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래도 좋은 의도로 만들어졌으며 재치있는 개그로 넘쳐나며, <록키 호러 픽처 쇼>에서 후의 , 근래의 <벨벳 골드마인>까지 들먹이게 만드는-록 뮤지컬의 양식상의 문제뿐만 아니라 주제에서 벗어난다고 하여 비록 아무도, 당연하게도 <지저스 크라이스트 수퍼스타>나 리처드 레스터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록 뮤지컬이라는 것에 뿌듯함을 느낄 것이다.

  • 빌리 코건 사진은 보너스입니다. 글이 너무 지루하게 느껴지실까봐. 저는 빌리 코건을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만, GISH 시절은 괜찮았다고 생각합니다.

-- Sonimage 2004-5-11 9:21 pm

2 # 촌평[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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