NinoRota/FedericoFellin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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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ino Rota & Federico Fellini 니노 로타와 페데리코 펠리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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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 로타와 페데리코 펠리니의 협력은 음악적 요소가 영화의 대상으로 엄연히 존재하는 국면을 만들어냈다. 간혹 펠리니의 서커스와 박람회장에 대한 열망들 속에 니노 로타가 반복적으로 제시하는 모티프들은 펠리니의 요구에 짓눌려, 더 이상 발전되지 못하고 자기복제적인 프로그램 안에서 돌아가는 루프처럼 되어버렸다는 평가들도 있지만, 1950년의 <하얀 추장>에서부터 1979년의 <오케스트라 리허설>에 이르는 두 사람의 동반자적 작업들이 간과될 수 없는 결과물이라는 것은 분명하다. 니노 로타의 영화음악을 한자리에 모아둔다면, 비단 펠리니와의 작업들만이 빛을 발하는 것은 아니겠지만, 그 두 사람이 함께 했기에 가능했고, 그것이 니노 로타의 다른 음악작업으로 전이될 수 있는 원동력이 펠리니와의 작업에서 쉽게 발견된다. 니노 로타의 사운드트랙 중 여전히 최고로 꼽히는 것은 <달콤한 인생>과 <8과 1/2>이며, 이것은 선호의 문제를 넘어선 니노 로타 음악의 특질의 문제인 것 같다. 그의 사운드트랙들이 재즈와 라운지 음악의 영향을 서커스 음악 안으로 한데 모았고, 희가극의 특성들, 혹은 펠리니를 사로잡았던 바리에떼(서커스, 음악 등의 공연이 제공되던 일종의 버라이어티 쇼 극장)의 경계없는 세계들 속에서 펼쳐지는 멜로디카의 따라 부르기 쉬운 선율들과 함께 이야기된다면, 이것은 분명 펠리니의 영화 세계에 의해 니노 로타의 음악적 영감으로 확장된 음악적 양상을 의미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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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 로타는 1911년 밀라노에서 음악가 집안에서 태어났고, 어린 시절부터 할아버지 지오반니 리날디의 격려 속에서 여러 악기들을 연주하기 시작했으며 음악 신동으로 불렸다고 한다. 그는 11살에 오라토리오 『세례 요한의 어린 시절』을 작곡하였고, 14살에는 3막극 오페라 『돼지치기 왕자』를 작곡하였다고 한다. 밀라노 콘세르바토리에서 작곡을 배웠던 그는 로마의 산타 세실리아 콘세르바토리에서 공부했다. 니노 로타는 드뷔시와 라벨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있으며, 그가 음악에 대해 체계적 공부를 시작하던 때에, 당시 프랑스 악파의 그룹 식스의 멤버들, 즉 다리우스 미요, 아르튀르 오네게르, 프랑시스 풀랑, 조르주 오릭, 제르멘느 타이유페르 등의 음악(이들은 장 꼭토, 에릭 사티와의 작업으로도 유명한 프랑스의 Les Six의 멤버들이다. 다리우스 미요는 라벨 이후 가장 중요한 현대 프랑스 음악 작곡가이며, 프랑시스 풀랑은 조르주 베르나노스가 대본을 쓴 오페라『카르멜 수사들의 대화』와 장 꼭토의 원작에 기반한 1막극 『목소리』등을 남겼다)에 경도되었다고 한다. 특히 프란시스 풀랑의 실내악은 당시 프랑스 살롱 음악의 한 경향으로 남았는데, 풀랑의 영향이 초기 니노 로타의 실내악 작품들에서부터 나타난다. 이러한 프랑스 살롱 음악의 영향은 독일 뮤직 홀 음악의 카바레 스윙 등의 요소들과 함께 모여 니노 로타 음악의 라운지 스타일로 나아간다고 볼 수 있다. 당시 살롱 음악은 시민적 중간계층의 등장으로 나타난 키취 음악으로 폄하되기도 했으며, 화려하고 기교적이면서 감상적이고 서정적인 특성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또 이와는 달리 반낭만적 성향으로 절대음악의 시대로 복귀를 주장한 신고전주의의 영향도 부분적으로는 무시할 수 없는데, 그것은 당시 음악계의 주도적인 경향이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실 신고전주의와 니노 로타의 인연은 각별하게 이고르 스트라빈스키와의 오랜 우정으로 제한된다. 두 사람은 서로의 음악적 스타일에는 관여하지 않았지만 지속적인 친분을 쌓아갔다고 한다. 니노 로타는 1930년부터 32년까지 장학기금을 받아 미국에서 공부를 하게 되었다. 그는 필라델피아 커티스 인스티튜트에서 로사리오 스칼레로와 프릿츠 라이너에게 작곡 등을 배웠다. 그의 미국 체류 시절의 영향은 재즈의 음형에 대한 그의 거리낌없는 참조로 후에 다시 드러나게 된다. 그는 밀라노 대학으로 돌아왔는데, 그때는 이미 파시스트에 의해 장악된 사회 분위기가 넘실거리던 때였고, 니노 로타는 1933년에 첫 번째 영화음악을 만들게 된다. 이것은 파시스트 영화라고 알려진 <인민들의 기차>이다. 그는 밀라노 대학에서 16세기 베니스의 작곡가이자 이론가인 지오제포 잘리노에 대한 논문으로 학위를 받는다. 당시 로타의 지도교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시대에 대한 영감에 사로잡혀 ‘피제티의 대위법’을 만든 피제티였다. 이후, 그는 바리 콘세르바토리에서 강의를 시작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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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노 로타는 1950년에 펠리니와 만나 <하얀 추장>을 필두로 하여, 펠리니의 초기 대작으로 좋은 평가를 받았던 , 그리고 최고의 흥행작이었던 에서 완벽한 조화를 이룬다. 고향인 리미니(에서 그려지는 시골 마을의 모델이 된 곳이다)에서 떠나 1938년 19살의 나이에 로마로 왔던 펠리니는 초기에 ‘마르크 아우렐리오’라는 유머 잡지를 비롯하여, 여러 영화잡지에 삽화를 그리고, 재미와 음탕한 유머를 담은 해학 소설을 썼고, 코믹함과 그로테스크, 패로디를 가미한 통속적인 연재소설로 인기를 얻었다(이후 펠리니 영화들의 많은 관심사들이 결정된 것은 이때라고 한다). 그가 영화에 정식으로 입문하게 된 것은 직업적인 시나리오 작가 일을 하다가 로베르토 로셀리니를 만나 그의 영화들에 조감독이자 공동 시나리오 작가로서 <전화의 저편>, <무방비 도시>, <유럽 ‘51> 등에 함께 참여하면서였다. 네오리얼리즘의 시대에 영화를 배웠던 펠리니의 영화들은 로서 명백한 네오리얼리즘과의 단절을 이루며 그들 진영으로부터 비판을 받았으나(앙드레 바쟁은 이 영화를 네오리얼리즘의 범주에 넣는 드문 이론가이다), 국제적인 성공을 이루었고, 이러한 성공은 니노 로타에게도 도약의 발판을 제공하였다(은 후에, 니노 로타가 발레곡으로 편곡한다). 트럼펫 선율의 [젤소미나의 테마]는 영화 의 캐릭터들 자체를 표현하는 것을 넘어서서 영화 안의 요소로 직접 등장하기도 한다(잠파노가 젤소미나의 죽음을 알게 되는 계기가 되는 가락으로 등장). 그리고 니노 로타의 음악은 펠리니의 , <카비리아의 밤>, <달콤한 인생>, <8 1/2>, , , , , 를 거쳐 1978년의 <오케스트라 리허설>까지 이른다. 니노 로타에 대한 평가는 그가 남긴 여러 오페라들과 발레곡들, 실내악곡들의 서정성과 멜랑콜리가 영화음악에도 그대로 전이되었고, 그룹 식스의 음악의 특징으로부터 영향을 받은 것 외에는 음악사의 새로운 혁신에 부응하지 못하여 부분적으로 신고전주의의 경향을 따르고 있다고 말해진다. 하지만 사실 니노 로타의 영화음악은 이탈리아의 오페라 부파에 대한 설명을 통해 잘 이해될 수 있다. 18세기 프랑스 오페라와 이탈리아 오페라 사이의 부퐁 논쟁(당시 프랑스 오페라는 이탈리아 사람 륄리에 의해 정립되었는데 춤을 아주 잘 추었던 그는 루이 14세의 비호를 받았고, 이탈리아의 오페라 세리아를 프랑스의 황실 중심의 국가적 성격에 맞게 만들었는데 발레에 많은 부분을 할애하고, 루이 14세를 비유하는 신화의 세계를 다루는 내용이 주를 이루게 하였다. 영화 <왕의 춤>이 그리고 있는 세계이다)의 한 축이었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오페라 부파라는 음악적으로 가벼운 희극 장르로 엄숙한 것을 가볍게 다루었다. 이것은 당시 시대의 비극적이며 장중한 오페라를 대신할 것을 찾는 대중의 요구에 걸맞았으며, 부분적으로는 영국의 게이와 페푸쉬의 『거지 오페라』(후에 쿠르트 바일과 브레히트가 다시 만든『 서푼짜리 오페라』의 원본)와 같은 맥락의 작품들을 계승한 셈이 된다. 루소와 같은 사상가들이 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했던 것도 음악성의 문제가 아니라(이탈리아 오페라를 지지하는 사람은 음악을 잘 모르는 사람으로 취급되었고, 실제로 그러하기도 했다), 두 오페라가 대표하는 시대와 사상의 양상의 문제였다. 엄격하고 화려한 공연과 복잡한 악기 편성, 신화적 내용들의 프랑스 오페라와는 달리, 후에 모차르트의 <피가로의 결혼>으로 연결되는 현실에 대한 풍자적 희가극이었던 이탈리아 오페라는 아주 효과적인 음형으로 자리매김되는 단순한 라이트 모티브와 반복적 선율로 낳았다(오페라 부파가 그렇다고 해서 사회 혁신에 대한 의식을 고취하는 것은 아니었고, 단순히 대중의 새로운 여흥으로 부각하게 된 새로운 음악 양식으로 자리매김되었다고 보는 것이 맞다). 니노 로타의 세계는 그룹 식스의 초현실주의, 부조리극의 취향과는 달리, 이러한 오페라 부파의 전통에서 이야기될 수 있을 것이다. 그는 실제로 롯시니를 비롯한 작곡가들의 음악을 여러 사운드트랙에서 임의로 편곡을 했고, 이것은 카톨릭에 대한 굳건한 믿음이 여전히 존재하지만 그 경건함은 오로지 고해성사를 구할 때만 유효한 세계와 비텔로니(한량)들의 대답을 구하지 않는 실존적인 물음들의 세계가, 바리에테의 등불이 비추는 밤의 세계, 서커스와 기인들, 난쟁이들, 화려한 옷의 여인들이 펼쳐지는 세계와 만나는 펠리니의 영화에 대한 탁월한 파트너로서 니노 로타가 참고한 음악적 전통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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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1/2>의 영화 속의 감독 구이도는 당시 이 영화를 만들기 시작하던 펠리니의 상황을 그대로 표현하고 있다. 펠리니는 자신의 상황을 영화화함으로써 실제 자신에게 닥친 위기에서 탈출한 셈이 되었는데, 촬영팀을 비롯한 스탭들과 계약을 하고, 스튜디오 촬영 일정도 결정된 상황에서 펠리니는 전체적인 시나리오를 확정짓는 것은커녕 모호한 구상만을 가지고 있었다. 수주일씩 연기되었던 촬영은 ‘스크린 테스트’의 화면을 영화에 담는 것으로 시작되어, 주연배우인 마르첼로 마스트로얀니만이 대강의 맥락을 이해하는 선에서 촬영이 지속되었다고 한다. 완성된 <8 1/2>은 영화 <8 1/2>에 대한 다큐멘터리이면서 동시에 영화감독의 자의식에 대한 많은 해석을 낳게 한 작품이 되었다(펠리니는 기자회견장에서 도망치는 구이도와 같은 상황과 결국에는 만나고 말았는데, <8 1/2> 과 <영혼의 줄리에타> 이후, <G. 마스토르나의 여행>은 결국 영화화되지 못하고, 그는 계약 불이행으로 인한 손해배상에 시달리게 되었다). 구이도가 자신 주변의 모든 여자들로부터 환대를 받는 할렘의 주인처럼 등장하는 꿈 장면을 비롯하여(여기에서 구이도가 여자들에게 채찍을 휘두르는 장면이 나오는데 니노 로타는 여기에 직설적이게도 바그너를 사용했다), 대단원을 장식하는 흰옷을 입은 모든 출연진들의 원형의 군무와 그 옆의 서커스 행렬(여기에서 니노 로타는 명맥하게 의 테마를 연상시키는 음악을 만들어냈다, 이것은 펠리니의 화면과 완전히 상응한다)에 이르기까지 니노 로타의 <8 1/2>은 니노 로타 음악의 모든 경향을 모은 경연장과 같다. 클래식 스코어에서, 재즈, 라운지 음악, 서커스 음악 등에 이르는 그 조합들은 니노 로타 음악의 하나의 전형으로 등장하고 있으며, 또한 그것은 마치 펠리니가 자신의 삶의 여정을 고스란히 내보인 것과 마찬가지로, 니노 로타 자신의 음악적 경유지점을 내보이는 것과 같다. 아코디언과 오르간, 피아노는 물론이고, 실내악의 범위를 넘어선 오케스트라, 전기 기타까지 등장하는 <달콤한 인생> 사운드트랙 역시 이런 맥락에서 니노 로타의 대표작이다. 펠리니가 근대성과 단절하기 위해 데카당스의 힘을 빌었던 것은 니노 로타가 20세기에 등장한 대중음악의 양상들을 포괄하는 것과도 유사하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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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국 니노 로타는 펠리니의 영화내에서 희가극의 새로운 경향을 만들어가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 펠리니는 이후 와 에서 자신의 청년 시절과 유년 시절을 그대로 투영시킨 영화를 만들어, 영화가 자신의 삶을 복제하도록 하였다. 니노 로타의 경우, 그는 펠리니의 영화들에서 많은 모티브들을 나중의 작품들에서도 그대로 가져다가 썼는데, 이러한 재인을 가능하게 하는 작업들이 니노 로타가 자기 작품을 모방하는 창조적이지 못한 작곡가라는 평을 듣는데도 일조했다. 그러나 펠리니 영화 내에서, 펠리니가 자신의 삶을 보편성을 띤 영화적 화제로 만들어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니노 로타의 음악 역시 펠리니 영화 내에서는 하나의 규범처럼 자리를 잡아 펠리니 영화의 코드로서 보편성을 이미 획득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재인은 오히려 펠리니와 니노 로타의 조합에서 기대되는 것이었다. 니노 로타 사후, 펠리니 영화에서 주로 작업한 니콜라 피오바니(Nicola Piovani)는 와 <진저와 프레드>, <달의 목소리> 등에서 자신의 오리지널 스코어라기 보다는 니노 로타를 명백하게 참조하는 음악을 만들었다. 그는 특히 「Ritornello dell'intervista 」같은 곡에서는 니노 로타의 의 스코어를 직접적으로 반복 인용해서, 니노 로타의 음악에 대한 재인으로 다시한번 펠리니 영화 자체를 환기시킨다. 펠리니의 가장 논란 많은 영화가 된 지휘자와 오케스트라 사이의 분란, 혹은 권위주의와 공동체 의식 사이의 분란 <오케스트라 리허설>은 니노와 펠리니의 마지막 작업이 되었다(들뢰즈는 그의 저서 『시네마 2』의 ‘시간의 크리스탈’을 다룬 장에서 선율 중심의 리토넬로ritornello와 리듬 중심의 갤롭gallop의 개념을 통해, 사운드에서 발견되는 크리스탈을 논의하는데, <오케스트라 리허설>을 참조하여, 리토넬로와 갤롭의 구분의 묘사불가능한 지점을 지적한다. 그는 펠리니와 니노 로타가 이루어낸 것을 놀라운 시선으로 보고 있다)

  • 수많은 니노 로타 영화음악 컴필레이션 중 국내에서 구하기 쉬운 두장의 앨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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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utto Fellini(2000, Cam Production)

펠리니 영화의 전체 작품들의 사운드트랙을 재발매하고 있는 캠 프로덕션에서 펠리니의 전 작품들의 영화음악을 한곡씩 선곡하여 컴필레이션으로 만든 이 앨범은 니노 로타의 앨범이라해도 무방하다. 펠리니가 니노 로타를 만나기 이전에 공동감독한 작품 <바리에떼의 등불>과 니노 로타 사후(그는 1978년 사망했다), 만들어진 <여인의 도시>, <꿈의 배>, , <진저와 프레드> 등의 몇 작품을 제외하면 모두 니노 로타의 곡들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러한 니노 로타가 아닌 다른 작곡가들에 의한 곡들은 니노 로타의 음악들이 펠리니 영화를 어떤 식으로 규정할 수 있는지를 쉽게 알 수 있게 한다. 멜로디카의 선율로 대표되는 니노 로타의 음악이 얼마나 양식화되어있는지도 간파할 수 있다. 니콜라 피오바니의 곡들은 니노 로타를 의식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살롱 음악을 직접 참고하여 경쾌한 회고조로 진저와 프레드의 뮤지컬 시대를 다시 불러오고 있으며, 루이스 바칼로프(<여인의 도시>)와 지안프랑코 플레니지오(<꿈의 배>)도 재즈와 바이올린으로 연주하는 동유럽 민속 음악, 피아노 소품을 중심에 두고 펠리니 영화에 다가가고 있다. 두장짜리 시디로 발매된 『Tutto Fellini』에는 펠리니의 모든 영화들의 개봉 당시 포스터들과 펠리니가 직접 그린 여러 일러스트들, 원래의 사운드트랙 커버들이 연대기 순으로 컬러로 실려있는 화려한 부클릿까지 있다. 하지만 부클릿의 모든 글들은 이탈리아어로만 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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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he Godfather Triology (2001, Silva Screen)

니노 로타는 펠리니와의 작업 뿐만 아니라, 루치노 비스콘티의 <로코와 형제들>, , 프랑코 제피렐리의 <로미오와 줄리엣>, 킹 비도어의 <전쟁과 평화> 등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여기서 그는 붉은 여단을 위한 영웅적인 군가나 러시아 민중을 위한 포크 음악 등으로 펠리니 영화세계에 조응할 때와는 다른 특성을 지닌 음악을 들려주었다. 특히,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영화음악은 시실리아 마피아를 상징하게 되는 음악적 요소를 만들어낸 작품으로, 니노 로타를 기억하는 또다른 청자들에게 중요한 작품일 것이다. 1972년에 니노 로타는 프란시스 코폴라의 <대부 1>의 영화음악으로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의 수상 후보로 올랐는데, 후에 아카데미 측에서는 후보 지명을 철회했다. 그것은 니노 로타가 <대부 1>의 테마로 썼던 음악 「Godfather Waltz」가 그가 1957년의 이탈리아 영화 (에두아르도 데 필리포 감독의 영화로 펠리니와 그의 오랜 파트너인 엔니오 플라이아노가 시나리오를 썼고, 줄리에타 마시나가 출연했다)를 위해 작곡했던 음악을 재활용하였다는 것 때문이었다. 편곡되어 오케스트레이션과 스타일이 전혀 달랐던 두 스코어의 유사성은 쉽게 간파될 수 없었지만, 자기 스스로를 복제했던 니노 로타에 대해 아카데미는 1972년에 후보 지명을 철회하고, 1974년에야 <대부 2> 주제가로 아카데미 영화음악상을 수여한다. 미국의 이탈리아계 이민자의 역사와 40년대 뉴욕을 배경으로 한 마피아들의 분란, 그리고 3대를 이어온 마피아 가문 콜레오네의 흥망성쇠를 다룬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3부작의 첫 번째 영화가 2001년에 개봉 30년을 맞이했다. 그리고 개봉 30년 기념으로 발매된 앨범이 바로 『The Godfather Triology』이다. 1, 2, 3의 영화음악의 하이라이트를 담아낸 이 앨범은, 모든 영화팬들의 동의하듯, 영화 를 가장 직접적으로 반영하며 그 자체로 영화를 환기시킬 수 있는 또다른 텍스트이다. 즉, 이 사운드트랙이 가진 멜랑콜리아의 거부할 수 없는 매력은 단순히 영화의 장면들을 기억 속에서 재구성시키는 것 이상으로 그 자체를 환원시킨다. 비록 이 앨범에는 의 감독인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아버지인 카마인 코폴라(Carmine Coppola, 플루티스트이자 작곡가로서 토스카니니와도 함께 작업했고, 이후의 코폴라 영화의 영화음악을 담당)와 세기의 전환기에 만들어진 오페라 『카발레리아 루스티카나』로 기억되고 있는 피에트로 마스카니(Pietro Mascagni)가 이 사운드트랙의 작곡가로서 이름을 나란히 하고 있지만, 무엇보다도 우리가 의 사운드트랙을 기념비적인 음반으로 기억하는 것은 니노 로타 때문일 것이다. 여기에 수록되어 가장 쉽게 영화 와 동일시되는 트랙들인 「The Godfather Waltz」와 「Love Theme(/Speak Softly Love)」, 「The Pick-Up」, 「The Immigrant 」등은 모두 니노 로타의 곡들이다.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는 시실리인들의 피의 역사를 재구성하면서 이탈리아인들의 감수성을 반영하는 작곡가로서 니노 로타를 초빙했고, 의 음악은 니노 로타의 멜로디에 대한 편향과 단순성, 직접적으로 드러나는 정감 등으로 극히 호소력있는 스코어로 평가되고 있다. -- Sonimage 2004-5-26 12:38 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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