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원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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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룡
姜元龍
작가 정보
출생 1917년 7월 3일
일제 강점기 일제 강점기 함경남도 이원군 남송면 원평리
사망 2006년 8월 17일 (89세)
대한민국 대한민국 서울 강남구 일원동 삼성병원에서 병사
직업 목사
정치가
철학자
신학자
시민사회운동가
저술가
언어 한국어, 영어, 프랑스어, 일본어
국적 대한민국 대한민국
학력 미국 뉴스쿨 대학교 대학원 교육학 석사
종교 개신교(장로회)
필명 아명(兒名)은 강원용(姜原用)
호(號)는 여해(如海)
활동기간 1936년 ~ 2006년
장르 수필
철학
기독교 신학 저술
배우자 김명주
자녀 강혜자(장녀)
강혜원(차녀)
강대인(막내아들)
웹사이트 (재)여해와함께

강원용(姜元龍, 1917년 7월 3일 ~ 2006년 8월 17일)은 일제 강점기대한민국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기독교 신학자이자 정치가·철학자·통일운동가·교육자·반일반공운동가·시민사회운동가이다.

1 이력[ | ]

그는 함경남도 출신이며, 아호는 여해(如海)이다.

일제 강점기 후반 일본에 유학을 다녀왔고 1945년 이후에는 김규식 박사와 여운형이 전개한 좌우합작운동에 투신하였고 한국기독교장로회 소속 경동교회에서 활동하였다. 1953년 미국을 거쳐 캐나다로 유학했다가 1957년에 귀국한 뒤 미국과 관련된 활동을 했다. 이후 기독교 단체 활동과 시민사회단체에서 활동하며 1972년 10월 유신 이후 로마 가톨릭교회김수환 추기경·윤보선 前 대통령·월남 퀘이커 교도 함석헌 등과 함께 반 유신 운동을 주관하기도 했다. 크리스천 아카데미, 평화포럼 등을 조직했다.

말년에는 참여정부에서 시행한 일부 정책이나 용이치 않은 친일파 청산 작업 등을 비판했다. 또 반미주의좌파 운동가들에 대한 반감을 보여 반대쪽에서 비판받기도 하였다.

2 학력[ | ]

3 생애[ | ]

4 저서[ | ]

  • 《내가 믿는 그리스도》
  • 《새시대의 건설자》 (1949)
  • 《폐허에의 호소》
  • 《자유케 하는 진리》
  • 《인생과 종교》
  • 《빈들에서》 (1993)
  • 《믿는 나 믿음 없는 나》 (1998)
  • 《역사의 언덕에서》 (2003)
  • 《강원용과의 대화》
  • 《여해 강원용 전집》

5 기타 경력[ | ]

5.1 인물평[ | ]

강원용은 이런저런 인물평을 남겼다. 이승만에 대해서는 탁월한 정략가라는 평을 남겼다.[1] 조봉암을 싫어하게 된 원인으로는 조봉암이 5·10 선거에 참여했다는 점을 들었다. 공산당에서 탈당하더니 5·10 선거에도 참여하여 당선된 것과 이승만 정부에서 농림부 장관을 하는 등의 이력을 보고 너무 왔다갔다한다 싶었다며 비판하였다.[1] 한편 미국조봉암을 지지하는 듯한 뉘앙스를 주며 이승만조봉암 사이를 저울질했다는 증언도 내놓았다.[2]

박정희에 대해서는 경제를 살린 점을 높이 평가하였지만, 나중에 뜻이 변질된 것으로 평가하였다.[3] 그러나 강원용은 박정희를 위험인물로 경계하였고 좌파로 의심하기도 하였다.[4] 장준하에 대해서는 높이 평가받을만 하나 정치적인 목적으로 활동하였다고 평가하였다. 사상계 등의 활동은 정치적인 목적이며 장준하의 야당활동은 반박정희 노선으로 정치적 목적을 바꾼것에 불과하다고 평가하였다.[5] 노무현 정권과 386 정치인에 대해서는 의사소통 부족과 비판 언론을 탄압하는 점을 비판하였다.[6]

5.2 상훈[ | ]

  • 1967년 방송윤리 향상 공로 표창장(국무총리상)
  • 국민훈장 모란장
  • 국민훈장 동백장
  • 체육훈장 청룡장
  • 일본 니와노(庭野) 평화상만해상(평화부문)

6 가족 관계[ | ]

  • 부인 : 김명주(1918년 ~ 2011년 4월 16일), 기독교 장로회 여신도회 회장 역임
    • 장녀 : 강혜자
    • 차녀 : 강혜원
    • 장남 : 강대인

7 기타[ | ]

7.1 박정희의 위험성 지적[ | ]

강원용은 박정희를 위험인물이라 지적했고 그가 만나는 인물들 조차 위험한 인물들로 보고 경계했다. 그는 박정희가 극좌적이고 폭력적인 인물이며 독재도 할 것으로 전망했다. 1961년5.16 군사 정변 이후 그는 박정희를 위험인물로 보고 주시하였으며, 그에 대한 정보를 미국측에 알리기도 했다. 그는 1963년 5월 18일 서울특별시 퇴계로 보훈처회관에서 박정희를 만나 독재할 생각을 말고 민생을 챙길것을 충고하기도 하였다.[7] 그러나 박정희장도영 등을 숙청하면서 권력의 발에 다가섰고, 그가 극좌파 사람들과 연결되었다는 소식을 접하면서 그를 추척하게 된다.

강원용은 박정희공산주의자로 판단하여 위험인물로 봤다. 동아대학교의 러시아어문학 교수로 있던 어느 지인에게서 박정희가 부산의 좌파 사람들을 만나는 것을 목격, 위험인물로 보고 추적한 뒤, 그 내용을 알려오자 강원용은 박정희공산주의자 활동을 조사해서 미국 측 인사들에게 알려주기도 하였다.[4] 박정희 등이 5.16군사정변을 일으키자 동아대학교 박 교수가 박정희 집안의 과거를 조사하여 자료를 정리하고 녹음기를 들고 박정희 주변의 대화를 녹음 녹취록을 작성한 것을 전달받았다.[4] 이후 강원용은 박정희를 위험 인물이자 극좌파로 규정하고 윤보선을 지지하였다.

7.2 윤보선과의 관계[ | ]

1965년 한일 비준 파동이 발생한다. 이때 윤보선유진산은 갈등하게 된다. 윤보선유진산이 진솔하지 못하고 정치적인 사람이라고 자주 비난하였다. 윤보선이 유진산과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강원용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하였다.[8]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지적을 사람을 직접 상대해보지 않고 타인의 말만 듣는 것은 편견이라며 일단 유진산과 함께 움직였다. 한민당 때부터 함께 정치를 해왔고 같은 민주당 구파의 리더였지만 그러나 계속 노선 갈등이 일어났고 결국 사이가 틀어지게 된다.

1960년대에 윤보선이 신민당을 할 때 유진산과 손을 잡자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그 사람과 손잡지 말라고 만류했다. 그러나 윤보선은 강원용의 말을 듣지 않았다.

윤보선 씨의 부인 공덕귀 여사가 제 스승인 손창근 목사의 애제자예요. 그래서 제가 공덕귀 씨와 잘 아는 사이였는데, 윤보선 씨가 공덕귀와 결혼하면서 윤 씨와도 인연이 맺어진 겁니다. 그 후에 윤보선 씨가 상공부 장관과 서울시장을 했죠. 부산 피난 시절에는 제가 어디에 가서 강연을 하면 참석해서 듣곤 했습니다. 윤보선 씨 집에 가보면 정말 양반 중의 양반가라는 느낌이 들었어요. 그런 집안 출신인 윤보선 씨가 공부는 영국에서 했으니(에든버러대에서 고고학 전공) 선비정신과 영국의 젠틀맨십을 겸하고 있었어요. 말이나 행동이 아주 신사적이었습니다.[8]

제가 윤보선 씨와 가까워진 것은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서였어요. 민주당 정권 시절 구파와 신파가 싸울 때 저는 어느 쪽에도 관여하지 않았거든요. 결국 선거에서 구파가 지고 윤보선 씨가 실권 없는 대통령이 되고 말았죠. 그때는 청와대에서 오라고 하면 가서 그저 밥이나 먹고 왔지 별 관계는 없었어요. 5·16이 터지고 나서부터 저와 가깝게 된 겁니다. 윤보선 씨는 대통령을 그만두고 나와 다시 야당을 했지만, 당시 야권의 거물인 유진산과는 아주 미묘한 사이였죠.[8]

처음에는 두 사람 사이가 그렇게 나쁘지 않았어요. 저는 유진산씨를 좋지 않게 생각했습니다. 신문에 유진산 씨에 대해 안 좋은 글을 쓰기도 했죠. 그랬더니 유진산 씨가 “중앙정보부에서 (강원용이) 돈을 얼마나 받아먹고 그런 글을 썼는지 조사해봐야겠다”고 했대요. 윤보선 씨가 유진산 씨와 같은 당(신민당)을 한다길래 제가 “그 사람하고 같이하면 안 된다”고 했지만, 듣지 않고 합했어요. 결국 거기에서 윤보선씨가 유진산과 갈라지면서 제 말이 옳았다는 걸 인정한 거죠.[8]

 
— 강원용의 증언

윤보선은 원칙론을 고수했고 유진산은 타협을 하면서 어느 정도 얻어낼 것은 얻어내자는 견해를 제시했다. 노선 문제로 윤보선과 유진산은 사이가 틀어졌고 강원용은 후에 내 말이 옳았다는 것이 인정된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한편 1971년에는 야당의 후보 단일화를 위해 강원용은 윤보선에게 후보 사퇴를 종용하였다. 그러나 윤보선은 김대중을 대단히 불신하였다. 강원용이 윤보선을 찾아가서 신민당 후보 김대중을 지지하라고 했습니다. 그랬더니 윤보선은 "강 목사가 사람을 몰라도 그렇게 몰라? 김대중이란 사람은 머리털부터 발톱까지 완전히 정치적인 사람이야"라는 것이라며 반대했다.[9] 그리고는 윤보선은 오히려 정치적으로 이용할 지도 모른다면서 "김대중을 믿을 수 없다"고 했다. 그래서 강원용은 다시 윤보선을 설득하였다.[9]

해위(윤보선의 호) 선생, 그렇게만 볼 게 아닙니다. 내가 세 사람 다 만나봤는데 가능성 있는 사람은 김대중 씨밖에 없습디다. 이번에 박기출 씨를 내보내면 1963년 선거와 똑같은 결과가 나옵니다. 그때 끝까지 출마를 포기하지 않은 변영태씨 때문에 해위 선생이 그 사람이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진 것 아닙니까. 이번에 박기출씨가 나오면 김대중은 박기출 씨가 얻은 표만큼의 차이로 질 겁니다. 그러면 국민들이 ‘도대체 누가 박기출이를 내세웠냐’고 들고 일어날 겁니다. 해위 선생이 매그루더에게 5·16 쿠데타군을 진압하지 말도록 했다는 게 사람들의 머릿속에 아직도 남아 있질 않습니까. 그 후에 반(反)박정희 운동을 해서 겨우 상처가 아물었는데, 이번에 그런 결과가 나오면 해위라는 이름은 우리 역사에서 영원히 지워지고 말 겁니다.[9]

다음날 오후에 박기출이 기자회견을 갖고 물러났고 윤보선은 김대중 지지로 돌아섰다.

7.3 권태양의 프락치설[ | ]

좌우합작위원회남북협상 당시 중도파에서 활동했지만 그는 김규식의 보좌진 중 송남헌이 추천한 권태양이라는 인물을 의심스럽게 보았다. 그런데 6.25 전쟁 당시 강원용은 숨어있다가 권태양김규식을 납치하여 공산주의자들에게 인도한 것을 목격한다.

그의 목격에 의하면 '권태양김규식을 서울을 점령한 공산주의자들에게 인도했다.[10]' 강원용의 증언에 의하면 한국 전쟁 당시 공산 치하의 서울에서 권태양이 박소붕이라는 사람에게 '당신 지금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함부로 떠들지 말아.' 라고 하는 말과 그 뒤에 박소붕에게 뭐라 하자 박소붕의 태도가 싹 달라지는 것을 보고 권태양의 정체를 의심하였다.[10] 또한 남북협상 당시에도 권태양이 오히려 김규식이 북한에 가도록 공작했다는 의혹을 제기하였다. '남북협상에 기대를 걸지 않던 김규식은 북에 가지 않을 목적으로 그를 보냈으나, 그가 김규식이 북에 가도록 일을 만든 것은 아닌가 하고 의혹을 제기하였다.[10]'는 것이다.

8 같이 보기[ | ]

9 각주[ | ]

  1. 1.0 1.1 동아일보 매거진::신동아
  2.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②) 이승만·조봉암 사이에서 양다리 걸친 미국 (6면)
  3. '박정희 축출' 다짐했던 미국, 베트남 파병 대가로 정권 보장, 신동아 2004년 2월호(533호)
  4. 4.0 4.1 4.2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박좌1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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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7. 인용 오류: <ref> 태그가 잘못되었습니다; 신동아533라는 이름을 가진 주석에 제공한 텍스트가 없습니다
  8. 8.0 8.1 8.2 8.3 [https://web.archive.org/web/20130929190011/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1.html Archived 2013년 9월 29일 - 웨이백 머신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1] 신동아
  9. 9.0 9.1 9.2 [https://web.archive.org/web/20130929184852/http://shindonga.donga.com/docs/magazine/shin/2004/03/02/200403020500004/200403020500004_3.html Archived 2013년 9월 29일 - 웨이백 머신 [강원용 목사의 체험 한국 현대사 ④] 12·12 직후 만난 DJ, “군인들은 내게 충성할 것”3] 신동아
  10. 10.0 10.1 10.2 강원룡, 《역사의 언덕에서 2:전쟁의 땅 혁명의 땅》 (한길사, 2006) 71페이지

10 외부 링크[ | ]

전임
고병익
제6대 방송위원회 위원장
1988년 8월 3일 ~ 1990년 12월 5일
후임
고병익

틀:민주회복국민선언 서명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