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쿠다 히데코

1 개요[ | ]

Fukuda Hideko
福田 英子(ふくだ ひで)
후쿠다 히데코

시미즈 시킨과 마찬가지로 오카야마 출생이며 메이지 여성운동의 선구자이다. 이 두 사람은 모두 자유민권운동에 따른 첨부인권 사상을 배워 여권 확립을 주장하였다. 후쿠다 히데코는 막부 말기 오카야마 번국 가노 이케다시를 섬기던 가난한 무사인 게이야마 가타시와 우메코의 세 번째 아이로 태어났다. 양친은 사숙 ‘석류사’를 열었지만, 그 후 아버지는 경찰, 어머니는 여자교훈소의 교사가 되었다. 어머니는 한자의 소양이 있었고, ‘여자라고 해도 장래는 무학으로 통할 수 없게 되므로 가능한 한 학문을 해야 한다.’고 항상 얘기했다고 전해진다.

소학교 졸업 후 15세 때부터 소학교 보조교원이 되어 내키지 않는 혼담을 거절하고 양친을 의지하며 자활했지만, 고바야시 구스오 등 오카야마의 자유민권가의 영향에 의해 민권사상에 눈을 뜨게 된다.

1882년 5월 오카야마 여자 친목회가 발족했을 때에는 히데코도 임원으로 이름을 올렸다. 오카야마에서의 기시다 도시코의 연설회 개최에 힘입어 ‘인간 평등론’을 연설했다. 이듬해에는 어머니와 사숙 ‘증홍교사’를 열었지만 2년 후 집회에서 교사는 폐쇄령을 받았다. 히데코는 ‘폐제 악법’ 철폐를 결의하여 상경, 민권사상가이며 작가인 사카자키 사칸의 집에서 기숙하며 사카자키로부터 심리학과 사회철학을 배우 미션스쿨 신영 여자학교에서 영어를 배운다.

1885년 민권좌파가 계획한 조선 개혁 운동(오사카사건)에 연좌되어 체포, 국사범으로 3년 3개월의 형을 받고 입옥되었지만, 89년 헌법 발표의 일반사면에 의해 석방되었다. 히데코는 그 후 간서 각지를 돌며 처자식이 있는 47세의 민권가 오이 켄타로와 결혼했지만 후에 결별한다. 이후에 동인사의 강사였던 같은 연배인 후쿠다 우샤쿠와 결혼하지만 십 년이 되지 않아 후쿠다와 사별하고 1901년 가을, ‘각설 여자공예학교’를 개설한다. 이어 1907년 1월 히데코는 여성의 눈으로 본 여성문제의 해명과 계몽을 목적으로 한『세계부인』을 발행하였다. 이 잡지에, 세계 각국의 여성참정권운동과 국내의 일본 내 ‘치안 경찰법’ 제 5조 개정 운동의 경과를 게재하였으며, 『세계부인』은 바로 이러한 운동의 조직이자 동시에 연락기관이기도 하였다. ‘아시오 광독사건’의 의연금 모집 활동 등에도 참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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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참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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